[金과장 & 李대리] 유학파 득세에 3년 영어학원 '도루묵'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국내파 vs 유학파
새로 오신 상무님이…"헉! 대학동기네"
김치 발음 vs 버터 발음…새벽 학원 다니며 공부했는데 유학파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해
보고 방식도 다르다…국내파 임원에겐 경험·직감, 해외파 임원은 "데이터 가져와"
새로 오신 상무님이…"헉! 대학동기네"
김치 발음 vs 버터 발음…새벽 학원 다니며 공부했는데 유학파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해
보고 방식도 다르다…국내파 임원에겐 경험·직감, 해외파 임원은 "데이터 가져와"
"천재 소녀가 왔다. "
미국 명문대 MBA 타이틀과 함께 해외 유명기업 근무 경력까지 갖춘 38세 여자 상무가 온다는 말에 회사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김 대리가 다니는 회사엔 이제껏 해외파 임원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기에 '천재 소녀'의 파괴력은 더 컸다. 과장들은 상무가 자기랑 동갑이라며 부러워했고,팀장은 열 살이나 어린 상사를 모시게 됐다며 머리를 쥐어 뜯었다. 임원들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낼까'며 속을 앓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회사 내에서 유학파들이 늘어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외국 대학을 나와 해외 기업까지 거친 유학파와 국내에서만 교육을 받고 직장 커리어를 쌓은 토종들은 업무 방식이나 문화의 차이 등으로 적잖은 갈등을 겪기도 한다.
◆"버터발음만 들어도 속이 뒤집어진다"
무역회사 해외영업팀에 있는 장 대리는 해외파 때문에 퇴사까지 고민할 정도다. 어학연수 한 번 다녀오지 않은 그는 발음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새벽에 꾸준히 영어학원을 다닌 노력 끝에 업무에 필요한 영어는 꽤 잘 구사할 수 있게 됐다. 부장도 영어 실력이 나날이 늘고 있다며 어깨를 두드려 줬다.
문제는 최근 유학파들이 늘어나면서 시작됐다. 팀원 절반 이상이 유학파,나머지도 1~2년 해외연수를 다녀온 사람들로 채워졌다. 이들이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의 발음과 유창한 표현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마다 정 대리의 어깨는 움츠러들었다.
한 유학파 후배가 정 대리의 발음을 트집잡아 "어학연수라도 다녀오지 그랬냐"고 했을 땐 얼굴이 새빨개졌다. "최근 신입을 뽑았는데 미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더라고요. '신입이 영어 잘해서 좋겠다'며 동료가 무심코 한 말이 제게는 대못처럼 느껴집니다. "
◆"상무님이 새로 왔다…대학 동기네?"
대기업 직원 이 차장은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유학파 상무가 새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내 취재에 착수했다. 40세,서울대를 나와 미국 아이비리그의 한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따고 외국계 컨설팅사에서 컨설턴트로 근무.'동갑인 데다 대학도 같네.그런데 누구는 벌써 상무 달고 난 아직도 차장이니…'라며 씁쓸해하는 순간 이름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학 시절 꽤 가깝게 지냈던 동기였다. 신임 상무가 부임한 뒤에는 어색한 만남들이 이어졌다. "둘만 있으면 야자를 트는데 다른 직원들과 같이 있으면 말을 높여야 하는 것도 어색하지만,그보다는 '신분 차이'가 너무 나서 제가 피해 다닙니다. "
◆"큰 조카뻘의 띠동갑 상사 때문에…"
그나마 '차장-상무'처럼 직속 상사가 아닌 경우는 다행이다. 가장 껄끄러운 관계는 사원부터 줄곧 한 직장에 있어온 부장급과 스카우트된 유학파 임원 사이다. 올해 46세로 직장생활 20년차인 정모 팀장은 최근 띠동갑 본부장인 강모 상무와 일하게 됐다. 강 상무는 34세 나이에 5개팀으로 구성된 본부를 총괄하게 됐는데 정 팀장을 비롯해 5명의 팀장들이 모두 강 상무보다 나이가 많았다.
아무리 연공서열주의에 익숙한 팀장들이라지만 사장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는 강 상무에게 반기를 들긴 어려웠다. 정 팀장은 "큰 조카뻘 상사 눈에 들려고 다들 열심히하는 모습이 안쓰럽다"고 말했다.
부장보다 나이가 어린 유학파 임원이 있는 경우에는 부장이 보고 체계를 건너뛰고 직접 대표에게 보고하는 일도 있다. 소위 말하는 '직보' 또는 '고공플레이'다. 부장의 의견도 일리는 있다. 한 기업에서 직장생활을 오래할수록 업무에 대한 확신이 커지게 마련인데 '물정 모르는' 임원이 딴지를 걸면 일이 엇나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그러나 직보가 반복되다 보면 임원과 부장 간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은 불문가지다.
◆유학파는 자료형,국내파는 기분형?
한 중견기업에 다니는 정 과장은 유학파 임원과 국내파 임원은 업무 스타일부터 다르다고 말한다. 유학파 임원은 상대적으로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는 경우가 많아 회사 및 업계 상황에 대해 객관적으로 파악하길 원한다. 따라서 업무 보고를 받을 때 각종 수치나 그래프 등 분석자료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국내파 임원은 해당 업계에서 사원부터 거쳐왔기 때문에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난 직감과 같은 주관적인 요소를 더 중시한다는 것이다.
정 과장은 "유학파에 외국계 기업 출신인 상무는 분석자료의 수치 하나하나에 엄격해 보고에 들어가기 전 몇 번씩이나 자료를 검토한다"며 "반면 국내 영업맨 출신인 전무에게 보고할 땐 나의 주관을 정리하고 그의 기분 상태를 고려한다"고 전했다.
◆"이즘(ism)이 안 맞아 못 다니겠네"
미국 대학에서 석 · 박사를 받고 정보기술(IT) 업계에 근무하다가 대기업 S사로 이직한 김모 차장.이직할 때만 해도 현지에서의 경험을 살릴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김 차장은 1주일도 되지 않아 팀장과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보고서 형식 때문.
김 차장은 제목 폰트와 글자체는 물론이고 줄 간격,기호까지 통일해야 하는 보고서 형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니냐"고 주장해 봤지만 팀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보고서를 쓸 때마다 팀장과 갈등을 빚던 그는 6개월 만에 결국 외국계 회사로 옮겼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2년여 동안 현지 업체에 근무하다 국내 대기업 L사에 스카우트된 손모 대리(34)는 근무 시간 때문에 갈등을 겪었다. 8시간 동안 열심히 일하면 바로 퇴근해야 한다는 게 손 대리의 신조.그래서 L사로 옮긴 후에도 칼퇴근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 쏟아진 것은 눈치뿐이었다.
손 대리는 "업무 시간에는 농땡이만 피우다가 퇴근할 때쯤 되면 야근한다고 하는 사람이 제일 짜증난다"며 "그러면서 업무 시간에 열심히 일하고 정시 퇴근하는 사람에게 눈치를 준다"고 푸념했다. 그 역시 입사한 지 1년 만에 외국계 회사로 다시 돌아갔다.
강유현/고경봉/노경목/강경민 기자 yhkang@hankyung.com
미국 명문대 MBA 타이틀과 함께 해외 유명기업 근무 경력까지 갖춘 38세 여자 상무가 온다는 말에 회사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김 대리가 다니는 회사엔 이제껏 해외파 임원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기에 '천재 소녀'의 파괴력은 더 컸다. 과장들은 상무가 자기랑 동갑이라며 부러워했고,팀장은 열 살이나 어린 상사를 모시게 됐다며 머리를 쥐어 뜯었다. 임원들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낼까'며 속을 앓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회사 내에서 유학파들이 늘어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외국 대학을 나와 해외 기업까지 거친 유학파와 국내에서만 교육을 받고 직장 커리어를 쌓은 토종들은 업무 방식이나 문화의 차이 등으로 적잖은 갈등을 겪기도 한다.
◆"버터발음만 들어도 속이 뒤집어진다"
무역회사 해외영업팀에 있는 장 대리는 해외파 때문에 퇴사까지 고민할 정도다. 어학연수 한 번 다녀오지 않은 그는 발음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새벽에 꾸준히 영어학원을 다닌 노력 끝에 업무에 필요한 영어는 꽤 잘 구사할 수 있게 됐다. 부장도 영어 실력이 나날이 늘고 있다며 어깨를 두드려 줬다.
문제는 최근 유학파들이 늘어나면서 시작됐다. 팀원 절반 이상이 유학파,나머지도 1~2년 해외연수를 다녀온 사람들로 채워졌다. 이들이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의 발음과 유창한 표현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마다 정 대리의 어깨는 움츠러들었다.
한 유학파 후배가 정 대리의 발음을 트집잡아 "어학연수라도 다녀오지 그랬냐"고 했을 땐 얼굴이 새빨개졌다. "최근 신입을 뽑았는데 미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더라고요. '신입이 영어 잘해서 좋겠다'며 동료가 무심코 한 말이 제게는 대못처럼 느껴집니다. "
◆"상무님이 새로 왔다…대학 동기네?"
대기업 직원 이 차장은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유학파 상무가 새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내 취재에 착수했다. 40세,서울대를 나와 미국 아이비리그의 한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따고 외국계 컨설팅사에서 컨설턴트로 근무.'동갑인 데다 대학도 같네.그런데 누구는 벌써 상무 달고 난 아직도 차장이니…'라며 씁쓸해하는 순간 이름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학 시절 꽤 가깝게 지냈던 동기였다. 신임 상무가 부임한 뒤에는 어색한 만남들이 이어졌다. "둘만 있으면 야자를 트는데 다른 직원들과 같이 있으면 말을 높여야 하는 것도 어색하지만,그보다는 '신분 차이'가 너무 나서 제가 피해 다닙니다. "
◆"큰 조카뻘의 띠동갑 상사 때문에…"
그나마 '차장-상무'처럼 직속 상사가 아닌 경우는 다행이다. 가장 껄끄러운 관계는 사원부터 줄곧 한 직장에 있어온 부장급과 스카우트된 유학파 임원 사이다. 올해 46세로 직장생활 20년차인 정모 팀장은 최근 띠동갑 본부장인 강모 상무와 일하게 됐다. 강 상무는 34세 나이에 5개팀으로 구성된 본부를 총괄하게 됐는데 정 팀장을 비롯해 5명의 팀장들이 모두 강 상무보다 나이가 많았다.
아무리 연공서열주의에 익숙한 팀장들이라지만 사장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는 강 상무에게 반기를 들긴 어려웠다. 정 팀장은 "큰 조카뻘 상사 눈에 들려고 다들 열심히하는 모습이 안쓰럽다"고 말했다.
부장보다 나이가 어린 유학파 임원이 있는 경우에는 부장이 보고 체계를 건너뛰고 직접 대표에게 보고하는 일도 있다. 소위 말하는 '직보' 또는 '고공플레이'다. 부장의 의견도 일리는 있다. 한 기업에서 직장생활을 오래할수록 업무에 대한 확신이 커지게 마련인데 '물정 모르는' 임원이 딴지를 걸면 일이 엇나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그러나 직보가 반복되다 보면 임원과 부장 간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은 불문가지다.
◆유학파는 자료형,국내파는 기분형?
한 중견기업에 다니는 정 과장은 유학파 임원과 국내파 임원은 업무 스타일부터 다르다고 말한다. 유학파 임원은 상대적으로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는 경우가 많아 회사 및 업계 상황에 대해 객관적으로 파악하길 원한다. 따라서 업무 보고를 받을 때 각종 수치나 그래프 등 분석자료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국내파 임원은 해당 업계에서 사원부터 거쳐왔기 때문에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난 직감과 같은 주관적인 요소를 더 중시한다는 것이다.
정 과장은 "유학파에 외국계 기업 출신인 상무는 분석자료의 수치 하나하나에 엄격해 보고에 들어가기 전 몇 번씩이나 자료를 검토한다"며 "반면 국내 영업맨 출신인 전무에게 보고할 땐 나의 주관을 정리하고 그의 기분 상태를 고려한다"고 전했다.
◆"이즘(ism)이 안 맞아 못 다니겠네"
미국 대학에서 석 · 박사를 받고 정보기술(IT) 업계에 근무하다가 대기업 S사로 이직한 김모 차장.이직할 때만 해도 현지에서의 경험을 살릴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김 차장은 1주일도 되지 않아 팀장과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보고서 형식 때문.
김 차장은 제목 폰트와 글자체는 물론이고 줄 간격,기호까지 통일해야 하는 보고서 형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니냐"고 주장해 봤지만 팀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보고서를 쓸 때마다 팀장과 갈등을 빚던 그는 6개월 만에 결국 외국계 회사로 옮겼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2년여 동안 현지 업체에 근무하다 국내 대기업 L사에 스카우트된 손모 대리(34)는 근무 시간 때문에 갈등을 겪었다. 8시간 동안 열심히 일하면 바로 퇴근해야 한다는 게 손 대리의 신조.그래서 L사로 옮긴 후에도 칼퇴근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 쏟아진 것은 눈치뿐이었다.
손 대리는 "업무 시간에는 농땡이만 피우다가 퇴근할 때쯤 되면 야근한다고 하는 사람이 제일 짜증난다"며 "그러면서 업무 시간에 열심히 일하고 정시 퇴근하는 사람에게 눈치를 준다"고 푸념했다. 그 역시 입사한 지 1년 만에 외국계 회사로 다시 돌아갔다.
강유현/고경봉/노경목/강경민 기자 y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