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은행 문제, 내 머릿속엔 계획 세워놨죠"
김석동 금융위원장과 밥 약속을 잡으면 무어라고 꼭 집어 표현하기 어려운 기대감이 밀려온다. 그는 어떤 질문에도 좀처럼 피해가지 않는다. 현안을 단순 명쾌하게 진단하고 대안을 내놓는 화법에 거침이 없다. 자신도 "내가 피해가는 스타일이 아니란 거 잘 알잖아"라며 동그랗게 눈을 뜬다. 그를 중용했던 사람들이 우리 경제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대책반장'을 맡긴 것도 그런 기질을 높이 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한 지인은 김 위원장을 이렇게 표현했다. "윗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말도 못할 정도였다. 일만 터지면 김석동을 찾았다. '사무관 김석동''서기관 김석동''과장 김석동''국장 김석동'은 뭘 해야 할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준비가 돼 있었다. 멀리 내다보고 일을 해 온 사람이다. "

이명박 대통령이 저축은행 구조조정을 포함한 여러 금융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한 소방수로 지난해 말 그를 불러들인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대통령 주변에선 "지금 상황에서 금융을 맡길 사람은 김석동밖에 없다"며 강력히 천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기야 일이 터질 때마다 차출되다 보니 해외 근무나 유학을 한번도 가보지 못한 그였다.

추석 연휴가 끝난 지난 14일 저녁.서울 공덕동에 있는 서산꽃게전문점 진미식당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입속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간장게장의 짭조름한 육질이 일품이라는 평을 듣는 곳이다. 꽃게장의 맛보다 그가 풀어낼 얘기 보따리가 더 궁금했다. '허연 머리카락,유난히 커다란 눈동자'의 김 위원장이 약속 시간보다 10분가량 늦게 차에서 내렸다. 그동안 썼던 금테 안경은 검은테로 바뀌어 있었다. 리모델링 공사를 막 끝낸 식당의 주인은 2층의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얼마 전 출가한 딸이 쓰던 곳이라는 설명을 했다.

"아이 배고파." 사진을 먼저 찍는 동안 김 위원장은 아이 같은 말투로 입맛을 다셨다. 그가 금융위원장으로 취임하기 직전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한국 고대사 얘기를 슬쩍 꺼냈더니 "아 고거,내가 그쪽엔 전문이지"하며 팸플릿 책자를 꺼내들었다. 단군 조선에서 시작되는 조선상고사에서부터 오늘날 수출 강국으로 성장하기까지의 한민족 역사와 역동성을 줄줄이 풀어냈다. 그는 "내 전화번호 끝자리가 흑룡강과 백두산 사이에 건국한 한민족 국가인 환국(桓國)이 건국한 해(BC 7197) 아닙니까"라며 책을 펴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가리키기도 했다.
금융위원장은 현안이 많은 자리다. 가계부채 문제를 물어봤다. 김 위원장은 저축은행 얘기부터 꺼냈다.

"나는 딱 세 가지 일을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첫째가 저축은행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저축은행은 우리 경제에 치명적인 대미지(damage)를 줄 사안은 아닙니다. 전체 금융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4% 정도니까. 그런데 정치적으로나 정서적으로는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닙니다. 신속하게 처리해서 비용을 줄여야 했으니까. "

김 위원장은 "내 머릿속엔 이미 모든 계획이 짜여져 있었다"고 말했다. "부산저축은행 영업정지를 발표할 때 '6월 말까지는 부실을 이유로 추가 영업정지는 없을 것'이라고 했던 것은 고뇌에 찬 결단이었다"고 설명했다. "만약 영업정지가 더 있을 수 있다고 했더라면 시장이 깨졌을 것이고,없다고 했으면 내가 바보가 됐을 겁니다. 미리 모든 것을 준비하고 시작했는데,김석동이가 무작정 터뜨렸다고 하니 참….하반기 구조조정(금융위원회는 곧 영업정지 대상 저축은행을 발표할 예정이다)도 살 길을 열어준 다음 추진하는 거 알잖아요. "

그가 정작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슈는 가계부채 문제였다. 가계부채는 전 국민에게 영향을 미칠 메가톤급 현안이라고 판단했다. 세계 경제 위기가 올해 3,4분기에 다시 찾아올 것으로 예상했던 그는 미리부터 가계부채 연착륙 대책을 시행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가계부채는 그대로 두면 대출하는 은행도 나쁠 게 없고,대출받는 사람들도 나쁠 게 없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행복한 상황에서 대책을 만들자고 주장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취임하자마자 관계부처 협의를 시작했는데,고맙게도 윤증현 장관이 적극적으로 공감해 줬어요. 대책이 필요하다는 합의가 이뤄질 때는 얼마나 기뻤는지."

그는 지난 9개월 동안 가장 보람 있었던 일로 가계부채와 관련한 정부 정책의 흐름을 바꿔 놓을 수 있었던 점을 꼽았다. 정책을 턴어라운드(turn around)시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그는 공직생활에서 배웠다.
"가계부채와 관련한 정책방향을 얼마나,몇 도나 틀었나"라고 묻자 김 위원장은 "꽤 틀었다"고 답했다. 그는 "밖의 경제가 좋으면 시간을 벌면서 천천히 가계부채를 관리할 수도 있겠지만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관치(官治)'라는 말이 늘 따라다녔다. 그는 정책을 다루는 공무원은 여론의 흐름을 통해 희열과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하려면 똑바로 해라''당신 때문에 죽겠다'는 비판을 듣는 것은 기쁜 일이에요. 그래도 할 필요가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얘기니까. 그런데 '뭣 때문에 하는 거냐'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공감대 없이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거니까. 그래서 저는 정책에 대한 동조자가 있고,그런 쪽으로 여론이 수렴될 때 기쁨과 희열을 느낍니다. "

반주로 나온 서산의 찹쌀 동동주가 몇 순배 돌았다. 김 위원장이라고 해서 늘 탄탄대로만 걷지는 않았을 터."공무원으로 일하면서 가장 괴로웠던 시절은 언제였나"라고 물었다. 잠시 입술을 꾹 다물며 생각에 잠기더니 1997,1998년 외환위기 때라고 했다.

그는 위기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던 1997년 1월께 재정경제부 외화자금과장을 맡고 있었다. 외환위기가 닥치자 6개월 정도는 거의 잠을 잔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국가 부도를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는데,언젠가부터 언론에 '김석동'이란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어느새 환란의 주범 가운데 한 명이 돼 있었다.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습니다. 검사가 '4명이 구속된다면 당신도 포함된다'고 하더군요. 구속은 피했지만,사실과 다른 보도가 잇따르자 친척들이 '공무원 그만하고 미국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미국엔 누님이 있었거든요. 1998년 초 집사람한테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그런데 집사람은 놀라운 얘기를 했습니다. " 그는 앞에 있는 술잔을 마시더니 "아내가 당시 했던 말은 정말 큰 충격이었고,지금까지 공무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라고 했다. 그는 당시 부인이 했다는 얘기를 목소리까지 재현하듯이 생생하게 전했다. 다음은 그가 전한 부인의 얘기.

"나는 학교 때 당신을 만나서 결혼했어요. 삼성물산에 취직할 때도,사표를 쓸 때도 나와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회사를 그만두고 무역회사를 한다고 했을 때에도,그러다 갑자기 회사 문을 닫을 때도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고시를 봐서 공무원이 될 때도 다르지 않았고요. 내가 정말 희한한 사람하고 사는 건데,하나 특이한 걸 느꼈어요. 월급 많이 주는 기업에 다닐 때나 사업을 할 때도 불만과 불평이 많았는데,공무원이 된 다음엔 그런 모습을 못 봤어요. 일 때문에 얼굴을 못 보는 날은 많았지만 한번도 일에 대해 불평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

"삼성 나와 무역회사 차렸다가 오일쇼크로 망하기도"

"저축은행 문제, 내 머릿속엔 계획 세워놨죠"
"마누라가 하는 말을 듣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여긴가 보다'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외화자금과장이면 나라 곳간을 지키는 경리부장인데,내가 나라를 이 꼴로 만들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다시는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때 아내 덕분에…."

카랑카랑하던 그의 목소리는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분위기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젊었을 때는 청년 실업가로 잘나갈 때도 있었다면서요?" 김 위원장의 첫 직장은 삼성물산이다. 1977년 입사해 기획실 조사부에서 근무한 덕에 무역이 이뤄지는 모든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직장을 다니다 보니 직접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고 했다. "무역이 쉬워 보이더라고.한국은 앞으로 이걸로 무조건 먹고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직접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1년 만에 뛰쳐나왔습니다. "

그는 '주제실업'이란 무역회사를 세웠다. 주제(主帝)란 회사명은 당시 제세산업,율산실업 등 잘나갔던 무역회사들보다 더 큰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뜻으로 붙였다. 주로 가죽 원단을 수입해 세무점퍼를 만들어 수출했는데,' 삼성 출신의 영파워'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업이 번창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가죽 원단이 두껍게 겹쳐지는 세무점퍼의 어깨선을 봉제할 수 있는 기술은 당시 우리만 갖고 있었다"며 "우리 제봉사는 점퍼 100벌 만들 원단으로 103벌을 만들 정도로 탁월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도 잠시.곧 오일쇼크가 찾아와 제세산업 율산실업과 같은 대형 무역회사가 줄줄이 쓰러졌고 주제실업도 문을 닫게 됐다. 담보 부족으로 무역금융을 융통할 수 없었고,바이어에게 큰 사기도 당한 터라 당시 김석동 주제실업 회장은 회사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대외거래,하청,통관 같은 걸 다 배웠습니다. 기업인이 대단하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당시만 해도 하루 종일 일하고 밤엔 접대하고 또 하청공장 다니고 그랬잖습니까. 그래서 기업인은 '전 인격적인 능력과 노력을 요구하는 직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니까. "

이런 실패의 경험은 그가 고시에 붙어 경제관료가 된 이후 벤처기업인들의 '패자부활'을 가능하도록 하는 정책을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고 한다.

김 위원장과 마주한 지 3시간가량 흘렀다. 꽃게장이 가득했던 접시도 거의 비워져 있었다.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겉으로 보면 실패한 우리금융지주 매각은 다시 추진될 수 있는지,하나금융지주의 외환은행 인수는 가능할지를 물었다.

"우리금융 매각은 이번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것을 테이블 위로 끄집어 올려 놓은 것이 큰 성과입니다. 이제 누가 다시 추진하더라도 우리금융을 민영화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됐잖습니까. 론스타는 법과 원칙의 문제로 봐야 됩니다. 우리 법원의 판단에 따라 결론을 내려야 대외적으로도 신뢰를 줄 수 있어요. 법원 판단이 나오면 드라이하게 처리할 겁니다. "

김석동 위원장의 단골집 '진미식당'
'밥도둑' 간장게장 전문…어리굴젓도 입맛 돋워

"저축은행 문제, 내 머릿속엔 계획 세워놨죠"
간장게장을 전문으로 하는 집이다. 9년 전 마포경찰서 뒤편에서 시작해 4년 전 맞은편 에쓰오일 주유소 옆으로 옮겼다. 충남 서산에서 알이 듬뿍 든 게만 골라 게장을 담근다.

꽃게가 알을 배는 때는 4~5월과 11~12월이다. 하지만 9월에도 알이 든 꽃게를 맛볼 수 있는 것은 4월에 사서 급속 냉동해뒀기 때문이다. 사흘간 서산 생강을 넣어 삭힌 간장에 숙성시켜서 나온다.

반찬으로 나오는 감태 위에 어리굴젓을 얹어 먹으면 간장게장 못지않은 밥도둑이다. 게와 김치를 넣고 끓인 겟국지도 입맛을 돋운다.

주메뉴는 간장게장이다. 1인분에 2만8000원이다. 그리고 아는 사람만 찾는 제철 메뉴들이 있다.
요즘 맛볼 수 있는 것은 간재미,11~12월엔 대하(큰새우)가 나온다. 12월 들어 날이 많이 추워지면 새조개가 올라오고,4~5월엔 또 대하철이 된다. 02) 3211-4486

▶1953년 부산 ▶경기고 서울대 경영학과 ▶재정경제원 금융부동산실명제실시단총괄반장,부동산반장,외화자금과장 ▶재경부 증권제도과장 ▶금감위 법규총괄과장,감독정책과장 ▶금감위 감독정책1국장 ▶재경부 금융정책국장 ▶재경부 금융정보분석원장,차관보 ▶금감위 부위원장 ▶재정경제부 1차관 ▶농협경제연구소 대표

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