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호통에 소신 꺾인 박재완
"장관 마음대로 해.마 치아뿌라(다 그만둬)."

8일 오전 국회 한나라당 정책위원회 의장실.이주영 정책위 의장은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을 이렇게 몰아붙였다. 내년 민생예산 논의를 위한 당 · 정 협의를 진행하던 도중이었다. 대학 등록금 배정과 관련한 당의 요구를 선뜻 들어주지 않자 원색적인 공격을 쏟아냈다. 결국 대학 등록금 부담 완화를 위한 정부 · 여당 예산안은 당의 뜻대로 1조5000억원으로 확정됐다.

정부를 압박해 법인세 · 소득세 감세 철회를 이끌어냈던 전날 당 · 정회의 풍경 그대로였다. 내년 총선과 대통령 선거 '표심(票心)잡기'에 몰두 중인 한나라당의 막무가내식 포퓰리즘 행보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는 정부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당초 이날 당 · 정 협의는 오전 7시30분부터 한 시간 정도 열릴 예정이었다. 대학 등록금 지원을 위한 예산 배정 규모를 놓고 1조5000억원을 요구한 당과 재정 압박을 이유로 1조3000억원까지만 가능하다는 정부 입장이 팽팽히 맞서면서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회의는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다.

이 의장을 비롯해 한나라당 김성식 · 임해규 부의장은 정부 측 참석자들이 계속 버티자 오전 10시쯤 "이럴 거면 판을 깨자.장관 마음대로 하라"는 거친 말을 서슴지 않으며 박 장관을 압박했고,박 장관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막상 박 장관이 자리를 뜨자 부의장들은 "추석 전 민생대책을 발표해야 한다"며 이 의장을 설득했고,이 의장은 몇 분 뒤 박 장관에게 "돌아오라"고 전화를 걸었다. 국회 본회의장에 머물던 박 장관은 10시30분께 당사로 돌아왔다.

박 장관은 이어진 회의에서도 "등록금에 1조5000억원을 배정하면 당이 요구한 기초노령연금 확대안은 수용할 수 없다"고 버텼다. 회의는 20분 만에 합의없이 끝났다.

이 의장은 본회의가 끝난 직후 박 장관을 따로 만나 "당의 의지는 매우 강하고,정치 신념을 걸고 추진하는 일"이라며 요구를 관철시켰다. 기초노령연금 확대안은 다시 논의하기로 했지만,정부 도움 없이 입법이 가능해 당의 요구대로 된 셈이다.

한 당직자는 "등록금 완화와 기초생활수급자 및 기초노령연금 확대,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를 국민들에게 추석 전에 보여야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내년 총선 ·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김재후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