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선교장처럼 매력적인 집도 없을 듯하다. 어스름하고 고즈넉한 새벽녘 뒷동산의 솔숲을 가만가만 걸으며 태고적 자연의 신비를 느낄 수 있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작은 도서관으로 개조된 열화당(悅話堂)에 들어가 물끄러미 서가를 보다가 책 한 권 툭 꺼내 달콤한 독서를 할 수 있다.

바람 쐬러 잠시 고택을 거닐면 아름다운 정자 활래정(活來亭)과 만나게 된다. 연못 가득 채운 홍련을 보노라면 세상에 이보다 호사스런 일도 없겠지 싶다.

선교장은 열린 집이다. 영조 때 집주인 이내번(李乃蕃)이 처음 염전을 경영해 가업을 일으킨 뒤 순조 때 집주인 이후가 열화당(1815년)과 활래정(1816년)을 건립해서 저택을 일신했다. 선교장은 관동팔경을 탐승하러 온 많은 시인묵객이 교류하던 살롱 같은 곳이 되었다. 얼마 전에는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위해 내한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의 다회가 열렸다.

선교장의 아름다운 정자 활래정.이 정자의 이름 '활래'의 뜻이 궁금해진다. 다행히 정자에는 활래정의 초건 기문과 중건 기문이 모두 걸려 있다. 조인영(趙寅永)이 집주인 이후를 위해 지은 초건 기문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금년 가을 백겸이 와서 말했다. '선교장 옆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 전당연(錢塘蓮)을 심고 그 위에 정자를 두어 주자(朱子)의 시구 활수래(活水來)의 뜻을 취해 활래(活來)라고 편액을 걸었네.내가 사는 곳은 그대도 감상한 적이 있으니 나를 위해 기문을 짓지 않겠는가?'"

구극(究極)의 경지는 같다. 심미적 깨달음은 꼭 자연을 보아야만 얻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어서도 만날 수 있다. 송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는 일찍이 책을 읽고 환히 깨달은 바가 있어 시를 지었다.

'반 이랑 네모난 못 거울처럼 열리니/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네/ 묻노니 어이하여 이다지도 해맑은가/ 근원에서 활수(活水)가 솟아나기 때문이지.'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는 맑은 연못,그것은 마음의 본래적인 모습을 형용하는 비유적인 실체다. 조선시대 성리학자 이황은 이 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반 이랑 네모난 못 거울처럼 열리니'는 마음 전체의 맑고 밝은 기상을 말한 것이고,'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네'는 마음이 사물에 감응하여 남김없이 비춘다는 뜻이고,'묻노니 어이하여 이다지도 해맑은가'는 마음이 어떻게 맑은 본체를 갖게 되었는가를 물은 것이고,'근원에서 활수가 솟아나기 때문이지'는 천명의 본연을 밝힌 것이라고.

이황은 주희가 노래한 마음의 본체를 실제 연못을 보고 구하고자 했다. 천운대에 올라 이황은 이런 시를 지었다. '솟아나는 활수는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의 거울이라/ 주자는 독서하며 작은 못에 깊은 비유/ 내가 지금에 맑은 못 위에 서 보니/ 주자의 그때와 비슷하여 길이 감탄하네.'

이후가'활래'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이미 주희의 시구를 알고 있었고 아마 이황의 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활래를 선택한 것은 그것이 방당(方塘)을 연상시키는 시어였을 뿐 아니라 선교장 옆에 있는 경호(鏡湖)의 이름 '거울(鏡)'과도 호응하는 시어였기 때문이다. 맑고 깨끗한 마음의 본체는 천지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든가.

활래정의 진정한 뜻은 열화당과 비교해야 드러날 것이다. 열화라는 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친척과 정담을 나눔을 기뻐하며(悅親戚之情話) 거문고 타고 책 읽으며 근심을 없앰을 즐거워한다(樂琴書以消憂)'는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속세를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유유자적하겠다는 마음으로 읽힌다. 활래 역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심성을 수양하며 살겠다는 뜻이나 진배없다.

그렇지만 선교장 집주인이 고향에서 유유자적하기에는 조선의 정치가 평온하지 않았다. 사실 활래정 기문을 지어 준 조인영은 혜경궁 홍씨의 오촌 친척으로 정조가 1795년 화성에 행차하여 회갑 잔치를 벌였을 때 외빈으로 참석했던 인물이다.

이후의 아들과 손자 모두 서울에 체류하느라 활래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고,증손 이근우(李根宇)가 1906년 활래정을 중건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에서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연이 활래정 앞 연못에 가득한 홍련의 아름다움 앞에선 안개처럼 사라진 전설일 뿐이다.

노관범 < 가톨릭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