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부장 의자에 껌 붙이고 골프공엔 상사 이름 써놓고…
세 명의 여성 직장인이 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입사했지만 직속 상사인 부사장의 괴롭힘에 하루 하루 힘든 나날을 보낸다. 그럴 때마다 복수하는 환상을 꿈꾸기도 하지만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던 어느날 세 명은 홧김에 낮술을 마시다 서로 비슷한 처지에 있음을 알게 되고 의기투합한다. 그리고 그들의 통렬한 반격이 시작된다.

직장생활의 애환을 그린 대표적 할리우드 영화 '나인 투 파이브'의 줄거리다. 성희롱과 격무에 시달리던 여직원이 책상 서랍을 열자 권총이 잠깐 비치는 영화 오프닝 장면은 직장인들이 가끔씩 상사들에게 표현하고 싶은,그러나 좀체 표현하지 못하는마음 한구석 응어리진 감정을 반영한다. 직장 동료와의 술자리에서는 "내일 박 부장 확 한번 받아 버리고 사표 쓴다"며 호기를 부리지만,정작 다음날이 되면 공손히 결재서류를 내미는 김과장,이대리들.어쩌랴.오늘도 그저 소심한 보복으로 쓰린 속을 달랠 뿐이다.

◆복수도 스마트하게

광고 대행사의 박 팀장은 화가 나면 분을 이기지 못하는 격한 성격으로 사내 악명이 높다. 하루는 외부 프레젠테이션용 수치를 외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담당 임원에게 혼이 나자 애꿎은 팀원들의 업무 습관을 질타하며 사무실 분위기를 냉각시켰다. 1시간쯤 후 화가 풀린 그는 팀원들에게 "오늘은 내가 쏠 테니 다들 점심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부원들은 모두 약속이 있었다. 할 수 없이 홀로 식사를 하게 된 박 팀장은 그 모습을 회사 사람들에게 보이기 창피했는지 일부러 멀리 떨어진 식당을 찾았다. 그러나 식당을 들어가려던 그는 다시 화들짝 놀란 채로 나와야 했다. 한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식사하는 팀원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고보니 그동안 가끔씩 혼자 식사해야 했던 상황들을 떠올리게 됐다. "속 좁은 녀석들"이라며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상사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메신저,스마트폰 등을 통해 해소하는 직원들도 많다. 한 정유 업체의 최 과장은 스마트폰의 미운놈 때리기 앱(애플리케이션)을 자주 활용한다. 앱의 상대 캐릭터를 마꾸 때리는 게임인데,원하는 사람 사진과 캐릭터를 합성할 수 있다. 그는 휴게실에 혼자 있을 때면 담당 부장의 얼굴을 합성해 캐릭터를 설정한 뒤 스마트폰을 통해 마구 두들겨댄다. 부장 얼굴이 벌겋게 부어 오르는 것을 보면 그나마 '반분'은 풀린다고.물론 이때는 은폐,엄폐를 확실히 해야 뒤탈이 없다. 게임에 열중해 있다보면 부장이 뒤에서 빤히 지켜보고 있는 것을 깜빡할 우려가 있다.

식품업체에 다니는 5년차 정 대리는 토를 다는 방법으로 소심한 복수를 즐긴다. 본부장이 팀장을 찾을 때 "어디 갔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정도 하면 될 것을 꼭 한마디 덧붙여서 "오늘 하루 종일 안 보이네요",또는 "저도 요즘 얼굴보기 힘들어서…' 등 팀장의 근무태도를 은근히 알리는 수법을 쓴다.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제 마음 한켠에서는 큰 복수를 한 것마냥 뿌듯해요. "

◆컴퓨터가 안 될 때는 혹시?

증권사에 다니는 황 대리는 하루종일 부장의 폭언에 시달리자 홧김에 부장이 퇴근한 이후 부장 컴퓨터 구동 속도를 떨어뜨리는 악성코드를 심어 놓았다. 다음날 출근한 부장은 PC를 부팅했지만 속도가 너무 느려 오전 업무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씩씩대기만 했다. 부장이 한참 고생한 이후 황 대리는 완전범죄를 위해 증거 인멸에 나섰다. 전산팀 담당자가 오기 전에 "컴퓨터를 체크해주겠다"며 악성코드를 제거한 것.부장은 범인인 황 대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맙다"는 칭찬을 연발했다.

의류업체 여성사원인 홍 과장은 같은 여성 후배들을 집중 공략한다. 자주 타깃이 되는 신입사원 정모씨는 그럴 때마다 홍 과장의 스트레스 해소 거리를 없애는 방법으로 앙갚음하곤 한다. 가령 홍 과장이 아침마다 얼음을 씹으며 스트레스를 푸는 습관이 있는데,정씨가 퇴근 전에 냉장고 안의 얼음을 모두 치워버리는 식이다. 내친 김에 홍 과장이 가장 좋아하는 카푸치노 커피믹스를 모두 집으로 들고 가기도 한다.

김과장,이대리들의 복수는 이 밖에도 상사 의자 위에 껌 붙여놓기,책상 위에 붙여놓은 일정 메모지 떼어내 숨기기,부장이 걸어놓은 양복 목덜미에 새빨간 립스틱 자국 묻혀놓기,골프공에 상사 이름 써놓기 등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다. 한 출판사 직원은 친구를 시켜 공중전화로 새벽마다 편집장에게 전화해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CCTV가 보편화된 요즘은 쉽지 않지만,과거엔 상사 의자에 몰래 오줌을 싸놓는 '대범한 복수'도 있었다.

◆"우리도 할 말 있다"

상사 입장에서도 할 말이 있다. 한 보험사 총무팀 정 과장은 옆부서 여성 대리 2명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다. 업무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정 과장이 일을 직접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조금 질책을 하면 '직속상관도 아닌데 왜 그러냐'는 식으로 쳐다본다. 같은 여성이라고 은근히 무시하는 분위기도 느껴진다. 하루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정 과장이 전화를 걸어 "두 사람 잠깐 이쪽 부서로 와보라"고 말하자 "이쪽이 두 명인데 과장님이 오셔야죠"라는 답변이 돌아왔단다.

직장 상사의 등쌀에 힘들어하는 김과장,이대리들도 젊은 신세대 부하직원들을 대하는 데는 애로가 빈번하다. 무역업체 직원인 한 과장은 "신입사원 중에는 외국어나 컴퓨터 등에 뛰어난 친구들이 많다보니 일을 하면서 선배들을 무시하는 투로 얘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속이 상한다"고 전했다. 건설업체의 방 팀장은 "여성 신입사원에게 조금 잔소리를 했더니 울음을 터뜨려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봤다"며 "요즘은 아래 직원들이 상전 모시기보다 더 어렵다"고 푸념했다.

고경봉/노경목/조재희/강경민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