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심장마비로 숨진 채 서울 청담동 작업실 소파에서 뒤늦게 발견된 설치 · 개념미술가 박이소.20일부터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그의 7주기 기획 드로잉전 '개념의 여정(Lines of flight)'은 마흔여섯에 세상을 떠난 고인의 넋을 달래는 굿판이다.

전시회장에 들어서면 세실 테일러의 '산공기',로바노의 '시카고' 등 귀에 익숙한 재즈 멜로디가 흐른다. 그가 생전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수천곡을 모아 만든 '엔드리스 재즈 컬렉션' 중 10곡을 고른 것.2층 전시장 입구에는 6m짜리 대형 흑백 드로잉이 걸려 있다. '내츄럴 마운틴'이란 제목이 붙은 이 작품은 그가 추구한 드로잉 예술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4개의 산을 통해 인간의 고난을 은유적으로 묘사했다.

그에게 드로잉은 미술의 조형적 기초 훈련이나 발전을 위한 표현 방법보다 창조적인 연구의 한 과정이다. 드로잉을 통해 개인의 정체성과 자아,다문화주의,사회 정치적 이슈들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 걸린 드로잉은 230여점.'내츄럴 마운틴' 옆으로 '오늘(요코하마)을 위한 설치 연구'가 보인다. 2000년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에 출품된 설치작업 '오늘'의 밑그림이다. 전시장 벽을 바닥에 넘어뜨린 후 그 위에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한 하늘 이미지를 투사한 작품의 잔상들을 빼곡히 그렸다.

그는 생전에 "우주적 시간과 생명에 대한 어떤 지점을 드러내고자 했으며,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태양계의 주인공이 손수 드로잉하고 있다"고 말했다.

1994년작 '스리 스타 쇼'도 눈길을 끈다. 흰 종이 위에 커피 콜라 간장을 사용해 세 개의 별을 나란히 그렸다. 유명인이나 범죄인을 상징하는 별을 통해 죽음과 생성에 관한 것을 묘사한 듯하다. 커피 콜라 간장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다문화 조건에서의 '다름'과 '공존'에 대한 비판적 태도도 보여준다.

곰브리치 등 미술사가 5명이 저술한 《세계 · 서양 미술사》의 첫 페이지를 그린 드로잉 '시작'도 나와 있다. 창작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작업의 주제와 내용으로 상정함으로써 예술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한 작품이다. '우리는 행복해요를 위한 설치 연구'는 2004년 부산비엔날레 출품작 '우리는 행복해요'를 연필로 그린 것으로 북한의 정치적 선전 문구가 눈길을 끈다.

김선정 독립큐레이터는 "1990년대 설치,회화,드로잉 등으로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작가의 삶을 재조명하면서 '인간 박이소의 예술 세계'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 전시"라고 설명했다.

고인은 인간의 무력함과 세상의 불가해함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미술계의 논쟁거리를 제공해왔다.

1985년 브루클린 그린 포인트지역에서 대안 전시공간 '마이너 인저리'를 운영했다. 2002년 에르메스미술상을 받았고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 대표작가로 선정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드로잉과 함께 사후 정리한 21권의 작가 노트 사본과 현대미술 및 드로잉에 관한 교육학 자료,육필 원고와 번역서,친구들이 작성한 서면 인터뷰 자료 등도 공개된다. 10월23일까지.관람료 3000원.(02)739-7098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