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Story] "임금인상 요구 대신 조합원 돈 굴려준다"
프린터에서 유기발광다이오드(AMOLED)까지 생산하는 일본 굴지의 제조업체 세이코엡손.1만2000여명이 일하는 이 회사의 노조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시미즈 미나부 씨(44 · 사진)는 명함이 두 개다. 노조 명함과 함께 자산운용사인 '유니온투자신탁'의 자산운용부 이사 명함이 그것이다.

시미즈 부위원장만이 아니다. 세이코엡손 노조는 상근자(40명)의 절반 이상인 26명이 파이낸셜플래너(FP)다.

시미즈 부위원장은 "세이코엡손 노조는 1995년부터 임금 인상을 요구하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래에셋이 29일 개최한 '퇴직연금 국제세미나'에 강사로 참석했다.

◆재무설계 도우미로

세이코엡손 노조의 슬로건은 'Life Up Union(조합원의 삶을 업그레이드하는 노조)'이다. 노조는 1995년부터 '조합원들이 보다 나은 인생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서포터(지원자)'를 자처하며 '라이프서포트(life support)'활동을 시작했다. 차츰 활동영역을 넓혀가 2008년에는 노조 산하에 자산운용사를 설립했다. 자산운용사를 가진 세계 최초의 노조가 됐다.

노조의 변화를 주도한 사람은 1986년 프린터 생산라인의 생산직 근로자로 입사한 시미즈 부위원장이다. 그는 노조 활동을 시작한 이유에 대해 "일본이 1990년대부터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상황에서 회사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임금 인상 요구를 매년 반복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미즈 부위원장은 "당시 일본에서는 평생고용이 사라지고 고령화가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있었다"며 "조합원들이 가장 어려움을 겪는 은퇴 및 자산관리 문제를 해결해주는 노조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보험료 줄이고 노후자금 늘리고

시미즈 부위원장은 생명보험 재설계 세미나부터 시작했다. 보험을 많이 가입하는 일본인들은 매달 3만~4만엔을 보험료로 내고 있었다. 불필요한 보험을 조정해 보험료 지출을 1만~2만엔 줄이면 그만큼 가처분소득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노조에 '라이프서포트국'을 설립해 체계적인 교육 과정을 진행하는 한편,노조 상근자들이 FP 자격증을 취득해 조합원들의 재무 상담에 적극 나서도록 유도했다. 조합원 대상 세미나 주제도 주택자금 마련,퇴직연금 운용,노후설계 등까지 확대했다.

노조 홈페이지는 개인 자산설계에 특화해 완전히 바꿨다. 주택대출과 자녀교육,노후자금을 계산할 수 있도록 하는 '부자계산기',개인 가처분소득에 따라 자동으로 월급 활용 방안이 구성되는 '자동컨설팅' 등의 기능도 추가됐다.

◆노조에 운용사 설립

노조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2008년 10월 2억엔을 출자해 자체 자산운용사인 유니온투신을 설립했다.

시미즈 부위원장은 "일반 자산운용사들의 펀드 수수료가 높아 운용사를 자체적으로 설립키로 했다"며 "설립 이후 연평균 11%의 수익률을 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니온투신에서 취급하는 상품은 다른 펀드에 투자하는 펀드인 재간접펀드가 유일하다. 판매수수료는 받지 않는다. 운용관리수수료도 다른 펀드(1.5~2.5%)의 절반 수준(0.8%)이다.

세이코엡손 노조는 활동비의 30% 이상을 라이프서포트 활동에 쓰고 있다. 하지만 노조원들의 부담은 오히려 줄었다. 시미즈 부위원장은 "1년에 14번 납부하던 노조회비가 12번 납부하는 것으로 줄었다"며 "쟁의활동 및 임금 인상 관련 조사에 사용하던 비용을 줄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시미즈 부위원장은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회사 경영진도 비용 절감을 고민할 수밖에 없어 임금 인상과 근로조건 개선과 같은 전통적인 노조의 요구는 비현실적인 것이 되고 있다"며 "노조는 전통적인 기능에 안주하지 말고 조합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계속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노경목/사진=신경훈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