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요. "

이희상 대한상공회의소 중견기업위원회 위원장(66 · 운산그룹 회장)은 중견기업이 처한 어려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난 주말 두 시간에 걸친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 내내 "제발 1200여개에 이르는 중견기업에 대해서도 정부와 사회가 관심을 가져달라"는 말을 반복했다.

지난 13일 기자간담회에서도 "중견기업이 되면 중소기업 때 받던 지원혜택 160개가 사라지고 대기업 규제만 늘어난다"며 "누가 중견기업을 하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이종태 퍼시스 사장은 "중소기업에서 졸업하면 정부 조달시장에 잔류할 수 없게 돼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분할했다"며 정부 정책을 꼬집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8일 경기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장 · 차관 9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정토론회에서 한국경제 기사(6월14일자 A 1,3면 참조)를 언급하며 중견기업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은 "열심히 해 중견기업이 됐는데 중소기업 지원이 떨어져 나가 할 수 없이 기업을 쪼개 중소기업을 만들었다고 한다"며 "우리 정책은 중소기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 3월 산업발전법을 개정,중소기업 범위를 벗어났지만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자산총액 5조원 이상)에는 속하지 않는 기업을 '중견기업'으로 분류했다. 중견기업들은 중소기업과 대기업 사이에서 겪는 고충이 많다며 정책적 대안을 마련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중견기업위원회의 역할이 궁금합니다.

"대한상의에서 중견기업을 위한 모임을 만든 게 1년6개월 전입니다. 격월로 모임을 갖는데 어느 날 보니 우리끼리 앉아서 불평만 하고 있는 거예요. '안되겠다' 싶더라고요. 중견기업의 존재부터 알리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 13일 가진 기자간담회도 그렇게 이뤄진 것이고요. 정부와 사회를 향해 불만을 토로하고 무작정 떼를 쓰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죠.처음엔 기자들이 대여섯 명쯤 올줄 알았는데 30명 넘게 왔더라고요. 엉뚱한 오해를 살까봐 속으론 '큰일 났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긴장한 적은 없었을 겁니다. (웃음)"

▼중견기업들의 고충이 적지 않은 듯합니다.

"우리가 잘못 얘기하면 중소기업 몫을 뺏으려 한다는 오해를 살 수 있어 조심스러웠습니다. 사실 모임을 처음 가질 때부터 고민이 많았어요. 우리 같은 기업들을 부를 이름을 어떻게 지을 거냐가 문제였어요. '대기업 · 중기업 · 소기업' 이렇게 분류하면 간단하겠지만,이미 중소기업이라는 포괄적 용어가 있어서 우리는 낄 데가 없는 거예요. 고민 끝에 결국 중견기업으로 했어요. 불만만 털어놓는다는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

▼중견기업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가장 큰 문제는 중견기업의 존재감입니다. 정부가 대기업 규제 등을 논의할 때 중견기업의 존재를 생각해줘야 하는데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중소기업 적합업종이 대표적이지요. 중견기업의 숫자가 적어서 그런지….개인적으로 세제나 금융지원과 같은 것보다 최우선적으로 중견기업을 관리하는 정부 기구가 하나 있었으면 합니다. 중소기업 정책을 담당하는 중소기업청처럼요. 정부가 어떤 제도를 만들려면 중견기업이 뭔지 정확하게 실태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지요. 중견기업은 대변할 수 있는 단체도 없고 정부 정책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청와대에서 기업들을 초청하면 대기업,중소기업은 부르는데 중견기업은 한 번도 초대하질 않아요. 대통령이 관심을 가져줘야 일이 빠른데…."

▼대기업으로 올라서는 중견기업이 드문데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요. 중견기업들의 힘만으로 벽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은 측면도 있고요. 샘표식품 같은 회사는 간장으로 커왔어요.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지요. 더 크려면 해외로 가야 해요. 일본에 가서 싸움을 하고 그러려면 엄청나게 투자도 해야 하거든요. 연구 · 개발(R&D) 투자는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

▼가업 상속 때문에 고민하는 중견기업인들이 많지 않나요.

"맞습니다. 회사를 물려주느니 팔아서 현금으로 상속하려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건상 가업승계가 힘드니 대기업에 팔아버리는 게 더 낫다는 거죠.부모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부모 세대는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앞만보고 달려왔잖습니까. 그런데 요즘 2,3세대를 생각하면 '잘해낼 수 있을까'안타깝고 걱정되지요. 기업 경영을 하는 일이 힘드니까 물려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예전과 다르고요. 굴뚝(제조업)사업은 더 그렇습니다. "

▼제조업을 기피하는 유학파 자녀들의 정서와도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옛날 같으면 아들이 두셋은 되는데 요즘은 하나가 대부분이지요. 얘들이 안 하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죠.그래서 기업의 상속문제는 세금문제뿐 아니라 포괄적인 제도 문제를 들여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직원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중견기업들의 고민입니다. 옛날엔 평생직장 생각하고 중견기업에 취직하는 사람이 많았는데,요즘은 2~3년 거쳐가는 곳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몇 년 전만 해도 왜 이렇게 회사를 자주 옮겼느냐고 물었는데 이제는 그 질문도 못하겠어요. "

▼동반성장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큰 틀에서 볼 때 법으로 강제하거나 기업 자율을 훼손하는 동반성장 정책은 바람직하지 않고 오래갈수도 없다고 봅니다. 중견기업은 대기업의 협력업체이면서 중소기업의 원청기업 또는 모기업으로서 양쪽 지위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갑'인 동시에 '을'이기도 하죠.동반성장 정책은 양쪽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중견기업이 많이 배출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

▼사회 전반에 기업가정신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선친은 '장사를 하다 보면 악하게 할 수도 있고 선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악한 사람은 선한 사람에게 이기질 못한다. 지금은 손해 같지만 양심대로 하는 게 이기는 것이다. 나쁜 마음을 버려라'고 하셨습니다.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 선친 사진을 걸어 놓고 중요한 일이나 도전과제가 있을 때면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여쭤봅니다. 저는 창업주도 아니고 2세로 여기까지 왔잖습니까? 70대가 되면 경영에서 손을 뗄 겁니다. 이제 몇 년 안 남았는데 젊은 사람들이 운산의 50년 미래를 잘 준비해주는 게 희망입니다. "

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