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독일 화가들에게 이탈리아는 로망 그 자체였다. 그곳을 방문한 화가들은 이탈리아의 눈부신 자연에 매혹됐고 로마시대와 르네상스기의 찬란한 문화 유적 앞에 넋을 잃었다. 그러나 정작 당대의 이탈리아는 국토가 사분오열돼 정치적 · 문화적 구심점을 상실한 데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말발굽에 짓밟혀 과거의 영광은 흘러간 옛 노래가 돼 버린 지 오래였다.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두터운 문화적 지층에 주눅든 게르만 화가들에게 그런 이탈리아의 착잡한 현실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들은 그저 '그랜드 투어'에 나선 여행객들처럼 로마와 나폴리의 고대 유적지에 들러 감탄사를 연발하고는 피렌체와 베네치아로 발길을 돌려 르네상스 예술의 명소를 둘러보면서 스케치 몇 장 남기는 것으로 미의 순례를 종결했다.

이런 피상적인 이탈리아 체험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 것은 1816년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이 출간되고 나서였다. 괴테가 3년간의 이탈리아 체험을 바탕으로 "예나 지금이나 나는 똑같은 나지만 이곳에서 뼛속 깊이 내가 변모했음을 느낀다"고 선언한 이래 독일 예술가들의 이탈리아 여행은 진정한 문화체험의 단계로 진입했던 것이다.

독일 예술가들은 이탈리아에 장기간 머무는 가운데 북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쾌청한 날씨와 아름다운 자연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인들이 좀처럼 정도를 이탈하지 않는 독일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유분방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북방에서 온 화가들에게 주체할 수 없는 해방감을 선사한다. 그들은 사시사철 태양이 작열하는 이 남국에서 자신들이 그토록 갈구하던 파라다이스를 발견했던 것이다.

19세기 초 독일 예술가들이 대거 이탈리아로 달려간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곳에 독일보다 폭넓은 아트 마켓이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나 런던 같은 예술의 센터가 없었던 독일에서 여기저기 국경을 넘나들며 고객을 찾아 나서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일 먼저 로마로 달려간 무리는 중세 기독교 미술과 르네상스 미술의 순수함과 정신성 추구로 돌아가자는 소위 '나자렌'으로 불리는 그룹이었다. 그들은 그동안 보아온 작품들은 피상적인 기교에 의존한 것으로 중세 및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이상적 미술을 추구할 것을 주장했다. 또 이탈리아 고전미술과 당대 독일 미술을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미술을 창출하려 했다. 이런 움직임은 1860년대에 아르놀트 뵈클린,안셀름 포이에르바흐,한스 폰 마레스 같은 젊은 화가들이 다시 한번 시도한다.

이 중 안셀름 포이에르바흐(1829~1880)는 뒤셀도르프,뮌헨을 거쳐 앤트워프와 파리에서 공부하고 1855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후반기 인생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리스 고전학에 흠뻑 빠졌던 그는 자신의 인물들을 그리스 조각처럼 묘사했다.

이런 특징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리오스토의 정원'에 잘 나타나 있다. 로도비코 아리오스토(1474~1533)는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그의 《광란의 오를란도》는 기사도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기독교도와 회교도 사이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모험과 사랑을 그린 것.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이탈리아의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공상의 세계로 낭만적인 도피를 감행했다는 점에서 단테의 《신곡》과 큰 대조를 이룬다.

아리오스토의 집안은 대대로 페라라 일대를 지배했던 에스테가의 가신을 지냈는데 그 역시 에스테가의 궁정에서 가신으로 활동하는 한편 창작에 몰두했다. 에스테가는 당시 피렌체의 메디치가와 함께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으로 유명했다. 안드레아 만테냐,티치아노,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같은 대가들이 페라라의 에스테가 궁정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시인 아리오스토 역시 오랫동안 알폰소 1세의 후원을 받았다.

그는 1525년 이후 비밀리에 결혼한 알레산드라 베누치와 함께 페라라에 머물며 시작과 정원 가꾸기로 만년을 보냈다. 포이에르바흐의 '아리오스토의 정원'은 바로 그러한 대시인의 면모를 르네상스의 무대 위에 낭만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보는 햇빛으로 충만한 자연 속에서 펼쳐졌던 르네상스인의 격조 있는 삶을 상기시킨다. 그림에서 사람들은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있다. 화면 오른쪽의 남녀 그룹은 가볍게 소요하며 문학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있는 듯한데 이 중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책을 들고 있는 인물이 바로 아리오스토다. 그의 왼쪽 어깨에 다정하게 몸을 기댄 여인은 그의 영원한 연인 베누치임에 틀림없다.

왼편 나무 아래에는 류트를 타는 남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애잔한 선율에 몰입한 모습이다. 특히 오른편 분수대에 기대 류트 연주를 감상하고 있는 여인의 우수어린 모습은 시적인 정서를 짙게 풍긴다.

이 작품은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르네상스시대 미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 아리오스토 일행 뒤에 자리한 르네상스풍의 웅장한 건물은 베네치아 화파의 대표적 화가인 파올로 베로네세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영향받은 것이고 청색과 핑크를 주조로 한 색채 구사 역시 벨리니,티치아노 등 베네치아파 화가들의 기호를 계승한 것이다. 소실점을 화면의 중앙이 아닌 좌측 깊숙이 설정한 것은 틴토레토의 영향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탈리아 미술을 당대 독일 미술과 결합시키려 했던 화가의 야심찬 의도는 그리 성공적인 열매를 거두지 못한 것 같다. 그림의 전반에 흐르는 멜랑콜리는 힘차게 새 시대를 향해 나아가던 독일의 현실과는 사뭇 동떨어진 모습이다.

오스트리아 지배 아래 숨죽이던 로마 제국의 옛 땅에서 화가가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도처에 만연한 패배주의와 회고 취미였다. 그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 화가 역시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낭만적 회고주의로 물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그림 속의 아리오스토가 그랬던 것처럼.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