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중동의 한 호텔.무역상담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호텔로 들어선 남미란 코리나 대표에게 건장한 젊은이가 다가왔다. 사복경찰이라고 신분을 밝힌 그는 조사할 게 있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한 구석방에서 의심쩍은 눈길로 여권과 투숙 이유,입국목적 등을 확인했다. 그런뒤 '미안하다'며 돌려보냈다. 남 대표가 혼자 호텔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혹시 '몸파는 여자'가 아닌가 의심한 것이다.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지만 중동은 매춘이 엄격히 금지돼 있다. 남 대표는 혼자 몸으로 중동시장을 개척하면서 이런 기가 막힌 일들을 수없이 경험했다.


인천 주안동 르네상스타워.이곳에 코리나(대표 남미란 · 37)가 있다. 스테인리스 싱크(Sink)와 주방용 액세서리를 수출하는 중소기업이다. 싱크는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커다란 그릇 모양의 물받침대다. 종업원이래야 불과 6명.그런데 벽에는 수많은 표창장과 인증서가 걸려 있다. 인천시장 표창패를 비롯해 '자랑스런 남구 기업인상' '경영혁신형 중소기업 인증서' 'ISO9001 인증서' 각종 특허증 등이다. 100만달러 수출탑도 탁자에 세워져 있다.

이 회사는 2000~3000달러짜리 소액 주문을 모아 수출한다. 남 대표는 "지난해 수출액은 300만달러에 육박했다"고 말했다. '티끌모아 태산'인 셈이다. 싱크 가격은 개당 50~100달러 수준.20~50개씩 주문받아 나무박스로 튼튼하게 포장한 뒤 수출한다. 생산은 아웃소싱한다. 수출국가는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국가와 이집트 케냐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아프리카 국가들이다. 수출국은 10여개국에 이른다.

중소기업 사장 대부분이 그렇듯 남 대표는 제품개발 생산관리 수출 등 거의 모든 업무를 총괄한다. 그 중 주특기는 해외시장개척이다. 대부분의 경우 혼자 떠난다.

"제가 창업한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여자 혼자 중동 국가에 입국하려고 하면 입국심사대에서 꼬치꼬치캐물었어요. 왜 왔느냐.누굴 만나느냐.비즈니스를 하러 온게 맞느냐.어떤 제품을 취급하느냐 등을 물었고 구석방으로 데려가 짐을 샅샅이 뒤지는 일도 비일비재했어요. "

도대체 비즈니스를 위해 방문하는데 왜 이리 까다롭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든든한 거래처가 있어 중동을 방문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바이어 개척은 마치 '안되면 되게 하라'는 특전사 구호를 연상시킨다. 대개 바이어 개척루트는 이렇다.

"중동과 아프리카 시장의 관문은 두바이예요. 해마다 두바이 전시회에 출품하지요. 2001년부터 건축자재전시회에 출품했습니다. 그렇다고 바이어와 바로 연결되는줄 아세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기껏해야 명함 정도 주고받는 데 그치지요. "

그에겐 명함이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명함 속 이메일과 주소로 제품 안내문도 보내고 메일도 보낸다. 그래도 별 반응이 없다. 그러면 직접 그 나라를 찾아간다.

"어렵게 중동을 방문해 해당 회사 문을 두드리고 담당자를 만나면 잘 기억하지도 못해요. '지난번 두바이건축자재 전시회에 출품해서 인사를 나눈 남미란입니다'라고 말하면 그제서야 어렴풋이 기억해내고 차 한잔 줍니다. 이런 식으로 보통 3년간 접촉하면 그제서야 2000~3000달러짜리 오더 한건을 받지요. "

남 대표는 "그러니 전시회 출품 즉시 수출 계약액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 사람은 무역의 기본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적어도 신시장을 개척하는 중소기업의 경우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카이로 두바이 요하네스버그 등 중동과 아프리카를 수없이 누볐다.

"해마다 두세 번은 갔으니 지금까지 적어도 20번 이상 방문했을 거예요. " 그가 이 사업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서였다. 대학에서 정보통신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그는 당초 휴대폰 액세서리 수출업체에서 일했다. 남 대표는 "주방관련 제품을 팔던 지인이 내수에서 벗어나 수출을 하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해 싱크 시장을 알아보던 중 직접 수출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2000년 서울 영등포에서 창업한 그는 "무역협회 주최로 코엑스에서 열린 바이어상담회에 참석했다가 중동 바이어와 알게 됐고 그게 바로 중동시장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라고 덧붙였다. 그 뒤 전시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두바이 등지에서 건축자재전시회가 있을 때 직접 출품하거나 방문해 바이어와 접촉했다.

이들 국가와 거래할 땐 오더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금회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는 중동 · 아프리카 바이어로부터는 주로 현금으로 결제받는다. 미국과 적대적인 국가의 바이어들은 달러를 잘 안 쓰기 때문에 유로화로 받는다. "결제조건은 바이어별로 다 다르지만 대개 일부 선불,일부 후불 형태"라고 덧붙인다. "아프리카 일부 국가들은 우리나라의 1960년대나 1970년대에 해당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고 결제능력도 부족하다"며 "하지만 국제원조를 받다보니 그런 자금줄과 연결된 바이어의 경우 현금결제 능력이 괜찮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해외시장 개척 시 무역협회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특히 코리나가 입주해 있는 빌딩에 무역협회 인천지역본부가 있어 이 본부로부터 무역기금 융자를 받아 활용하기도 한다. 배상필 무역협회 인천지역본부장은 "요즘 들어 국내 기업들이 아프리카에 눈을 돌리고 있으나 남 대표는 이미 10년 전부터 발로 뛴 개척자"라며 "노하우가 쌓인 만큼 이 지역으로의 수출을 크게 늘릴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수시로 코리나를 방문해 애로사항을 듣고 해결방안 마련을 위해 함께 고민한다.

남 대표는 해외출장 등으로 바쁘다보니 지난해에야 비로소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남편은 자기 사업을 하고 남 대표는 싱크 수출을 하는 등 각자 자기 사업에 매진한다. 다만 결혼 후에는 해외출장 시 직원들을 자주 내보내는 편이다.

남 대표는 제품 개발에도 적극 나서 꽃무늬가 들어간 싱크,금도금을 한 싱크 등 다양한 제품을 개발했다. 그는 "중동의 부호들은 특히 화려한 금제품을 좋아한다"며 "그렇다고 싱크대를 금으로 만들 순 없어 이들을 겨냥한 제품의 경우 금도금을 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외주생산업체도 수시로 방문해 매뉴얼에 따라 철저히 검사한다. 그가 보여주는 매뉴얼에는 재질 치수 색깔 무늬 등 수많은 체크포인트를 담고 있다. '싱크대용 야채배수대'에 대해선 특허등록했고 '싱크대 작업용 전자장치'에 대해선 국제특허를 출원 중이다. 그는 "중동 아프리카 시장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동시에 동유럽과 남미의 문도 두드리고 있다"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주안(인천)=김낙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