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흑해 중동부 항구도시 카파를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타타르인들은 한 가지 꾀를 냈다. 괴질에 걸려 죽은 시체를 투석기로 성 안에 던져 넣은 것이다. 성 안에선 이유도 모른 채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당초 아시아에서 발생한 흑사병은 이렇게 유럽에 상륙했다. 이어 해상 무역로를 타고 제노바를 거쳐 유럽 곳곳으로 퍼져갔다. 불과 4년여 동안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500여만명이 희생됐다.

페스트 균을 지닌 쥐벼룩이 병을 전파시켰으나 사람들은 원인을 엉뚱한 데서 찾았다. 그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라며 신에게 고백하고 열렬히 기도했다. 마녀가 창문에서 빨간 스카프를 흔들면 감염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면서 마녀사냥도 벌어졌다. 의사들도 몸에서 피를 뽑아내는 사혈법을 쓰거나,금과 에메랄드 가루를 함유한 약을 처방하는 게 고작이었다.

인간은 이처럼 오랫동안 질병의 원인을 신의 노여움이나 악령 탓으로 돌렸다. 일부에선 부패물질,시신에서 나는 냄새,나쁜 공기 등을 원인으로 꼽았다. 우리나라에서 두창(천연두)을 '마마'로 불렀던 이유도 재미있다. 상감마마 등에 쓰는 극존칭인 마마라고 부르면 두창의 기분이 좋아져 환자의 몸에서 떠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질병의 원인에 대한 인류의 무지를 깨뜨린 이는 파스퇴르다. 실험을 하던 중 S자 플라스크에 유기용액을 채운 뒤 끓였더니 오래 둬도 용액이 흐려지지 않았다. 반면 용액을 공기 중에 노출하면 금방 뿌옇게 흐려졌다. 그래서 플라스크의 구부러진 부분이 공기 중 미생물의 접근을 막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파스퇴르는 독일 의사 로베르트 코흐와 함께 광견병 바이러스,탄저균,결핵균 등을 발견해 이들이 질병의 원인이란 것을 입증했다.

유럽에 공포를 몰고온 '장출혈성대장균'이 아직 보고된 적 없는 악성 변종 박테리아라고 WHO가 발표했다. 치명적 독소를 배출해 출혈을 동반한 설사를 일으키는데다 강한 전염성을 가진 모양이다. 감염원을 밝혀내지 못해 환자가 계속 늘 것으로 우려된단다. 과학 · 의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배양할 수 있는 미생물은 1% 정도라고 한다. 중세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그나마 상당수 병원성 박테리아가 고온으로 가열하면 죽는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