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온양군의 관아가 있는 읍내동의 초입,온양향교로 접어들자 하마비와 홍살문이 나그네를 맞는다. 그러나 향교가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그것으로 끝이다. 향교로 들어가는 외삼문은 무문관처럼 굳게 닫혀 있다. 읍내동 당간지주(보물 제537호)로 발길을 돌린다. 당간지주는 깃발을 달아 절에 행사가 있음을 알리는 장치다. 이 고려시대의 당간지주는 기단은 땅속에 묻힌 채 마주 세워진 두 개의 화강암 기둥만 우뚝 서 있다. 집도 절도 없이 길가에 홀로 서 있는 '깃발 없는 기수'가 안쓰럽다.

◆고불이 불던 퉁소 소리 아련히 들려올 듯

온양군 동헌을 찾아들자 계자 난간이 아름다운 2층 문루 온주아문이 나온다. 동헌은 앞면 6칸 · 옆면 2칸 크기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일제강점기엔 주재소,해방 후에는 파출소로 명맥을 이어오다 1993년에 복원한 것이다. 동헌 마루에 걸터앉으니 건너편에서 설화산(440m)이 수인사를 건넨다.

산그림자를 품은 논들을 바라보며 배방면 중리 맹씨행단에 닿는다. 고불 맹사성(1360~1438)이 심었다는 600여 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고택 앞을 지키고 섰다. 이 고택을 굳이 맹씨행단이라 부르는 것은 공자가 은행나무 단 위에서 강학했다는 고사에서 비롯한 것이다. 최영 장군이 맹사성을 손녀사위로 삼고 물려주었다는 이 고택은 조선 전기 민가의 모습을 담고 있다.

고택의 본채는 가운데 두 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로 세 칸씩 온돌방을 배치했으며 반 칸 크기의 퇴칸을 앞으로 낸 'H'자형이다. 1970년 중수 때 초창기의 것이 아니라고 해서 건물 앞쪽에 있던 부엌을 없애버려 어색한 형태가 돼버렸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건물을 살핀다. 마루대공 양쪽에 ∧형태(소슬)로 나무를 덧대어 도리를 단단히 받친 소슬합장과 문을 열지 않고도 밖을 살필 수 있는 눈곱째기 창이 눈길을 끈다.

음률에 밝은 맹사성은 퉁소를 즐겨 불었다고 한다. 대청에 앉아 배방산 줄기를 바라보며 퉁소를 부는 고불의 모습을 그린다. 퉁소의 맑은 가락을 사랑한 사람이 청백리가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 맹사성 · 황희 · 권진 등 세 정승이 어울려 국사를 논의했다는 구괴정이 커다란 느티나무 양산을 쓰고 적막하게 앉아 있다.

◆은은한 달빛이 마당을 채우던 초가집의 흥취

설화산 자락 외암리 민속마을로 발길을 옮긴다. 500년 넘게 살아온 예안 이씨들의 씨족마을이다. 마을 앞을 흘러가는 반계를 건너 외암마을로 들어간다. 마을과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늙은 정자나무를 지나자 고샅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돌담은 아름답긴 하지만 야박하다. 길의 끝을 쉽게 드러내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뒷짐을 지고 고샅길을 걸으며 연방 헛기침을 해대던 고향 마을 어른들을 떠올린다. 그 옛날의 고샅은 그렇게 '느림의 미학' 종결자였다. 행인도 한가하고 정원의 소나무나 길가에 피어난 하늘매발톱꽃도 한가하다. 설화산 자락으로부터 마을 안으로 부지런히 물을 실어오는 돌담 밑 수로(水路)만 바쁠 뿐이다.

'영암집'이라고도 부르는 외암 이간의 건재고택을 찾아든다. 추사 김정희의 두 번째 부인이 이간의 현손녀이니 추사의 처가댁인 셈이다. 그러나 건재고택은 솟을대문 앞까지만 자신을 허락할 뿐이다. 하릴없이 송화군수를 지낸 이장현(1779~1841)의 고택인 '송화댁'으로 발길을 옮긴다. 역시 문은 닫혀 있고 그새 높여버린 담장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예전엔 그래도 담장 너머로 하인들이 거처하던 가랍집에서 본채까지 이어지는 소나무숲과 멋스럽게 구부러진 노송들을 볼 수 있었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이조참판을 지낸 이정렬(1865~1950)의 고택 '참판댁'으로 향한다. 외암마을에서 가장 개방적인 집이다. 'ㅁ'자형 안채 마당엔 때마침 모란과 앙증맞은 꽃을 주렁주렁 단 금낭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이 집은 예안 이씨가문에서 내려온 비법으로 연잎과 쌀로 섞어 연엽주를 빚는 집이다.

마을의 대부분인 초가집을 들여다본다. 처마와 처마를 맞대고 있는 초가집은 공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외벽에 걸린 소쿠리 · 바구니 · 채반들은 거칠지만 소박한 삶을 보여준다. 한겨울엔 지붕에 살짝 사다리를 걸쳐놓고 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참새를 잡던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른다.

초가집은 그렇게 타 생명체의 공생을 허락하던 생태 건축이다. 외암마을의 집들은 살기에 편하도록 가구를 많이 고쳤고 돌담들은 허물어진 데 하나 없이 말짱하다. 세월 혹은 삶의 흔적이 묻어 있지 않은 아름다움이란 밋밋한 것이다. 우린 속도와 그 속도에 적응하려는 삶의 경박성 때문에 고향과 때 묻지 않은 인간성에서 얼마나 멀어져 버렸는가.

◆만공 스님과 다산 정약용의 체취가 서린 곳

송악면 유곡리,신라말 887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봉수산 봉곡사로 향한다. 제법 연륜이 쌓인 소나무들이 연출하는 구불구불한 숲길이 다정하다. 나무도 길도 연륜이 쌓이면 저절로 구부러진다. 구부러진다는 건 너그러워진다는 뜻이다. 소나무가 안겨주는 너그러움에 마음이 슬슬 풀어질 즈음 줄기의 껍질에 생채기를 입은 소나무들이 눈에 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비행기 연료로 쓰려고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다.

소나무 숲길의 끝에 이르자 1993년에 주지였던 묘각 스님의 원력으로 세웠다는 만공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봉곡사는 만공(1871~1946) 스님이 1895년 처음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이윽고 대웅전과 향각전,요사와 고방뿐인 봉곡사가 단출한 면모를 드러낸다. 보살의 안내를 받아 요사에 덧붙여진 정면 3칸,측면 2칸의 고방(창고) 2층으로 올라가본다.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고 2층의 벽면은 판벽이다. 시원해서 여름에 낮잠 자기 안성맞춤인 다락방이다.

대문으로 들어가 'ㅁ'자형 요사를 들여다본다. 1795년 가을 주문모입국사건으로 금정도(홍주) 찰방으로 좌천된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이곳에서 열흘 동안 목재 이삼환 등 13명의 실학자들과 이익의 《가례질서》를 강론하면서 묵은 곳이다. 다산은 이곳에서의 일을 기록한 '서암강학기'에서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여러 친구와 함께 시냇가에 나가 얼음을 깨고 샘물을 떠서 세수하고 양치질을 하였으며,저녁에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산언덕에 올라가 소요하면서 풍경을 바라보았는데 연기와 구름이 섞여서 산기(山氣)가 더욱 아름다웠다"고 회고하고 있다.

삼성각 앞에는 다산과 만공의 현신인 듯 모란과 작약이 만발해 있다. 온양온천역 옆 장터에서 열리는 온양 오일장(4,9일)을 찾는 것으로 갈무리하기로 한다. 장사꾼들이 각종 채소 나물 약초 수박 등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펼쳐놓고 앉아 있다. 몇 발이나 되는 긴 고무줄을 들고 돌아다니며 파는 고무줄 장사가 반갑다. 온양장은 옛 풍물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오일장이다. 시장을 돌아보면서 여행이란 모름지기 자신의 날카로운 빛을 감추고 속세의 티끌과 함께하는 화광동진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렇지 않은가.


◆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 천안 IC → 아산

◆ 맛집

외암리민속마을에서 강당골 방향으로 가는 길의 외암리시골밥상가든(041-544-7157)은 맛깔스러운 식당이다. 시골밥상정식을 시키면 삼겹살 수육,도토리묵전,홍어회 무침,시래기 된장국,장아찌,나물 등이 푸짐하게 차려져 나온다. 광덕산 도토리로 만든 도토리묵전,직접 말리고 삶은 시래기를 듬뿍 넣고 끓인 된장국과 장아찌 등이 일미다. 정식 1만3000원,보리밥 7000원.

◆ 여행 정보

아산 온양을 상징하는 아이콘은 온천이다. 고려 초부터 온수군이라 불렀던 것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선 세종이 안질 치료차 행차한 이래 세조,영조 등이 휴양이나 병 치료차 머물다 간 기록도 있다. 임금이 와서 머문 온궁이라는 궁궐까지 있었을 정도로 가장 오랜 온천의 역사를 가진 고장이다.

온양 지역의 온천은 일제강점기에는 경남 철도주식회사가 경영하던 신정관과 일본인이 소유한 탕정관 등 2곳뿐이었지만 1963년 신천개발이 온천을 개발한 것을 계기로 세종대왕의 눈병을 치료한 샘물로 유명한 어의정 등 38개의 온천공이 있다. 피부미용,혈관경화증,신경통,부인병,위장병,빈혈 등에 좋은 약알칼리성이 풍부한 온천으로 알려진 이곳에서 온천욕을 하며 번뇌를 씻어내는 건 어떨지.

안병기 여행작가 smreoquf@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