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뒤집어 읽기] 화교 네트워크 확산은 '中본국 무관심'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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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 시달리자 협력으로 생존 모색
처음 나간 사람은 대부분 하급 노동자…가족 중심적 기업문화로 富 일궈
처음 나간 사람은 대부분 하급 노동자…가족 중심적 기업문화로 富 일궈
"바다 물결이 닿는 곳에 화교가 있다. " 전 세계에 화교가 없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대만의 '중화민국교무통계(中華民國僑務統計)'에 따르면 세계의 화교 수는 3600만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동남아시아가 3000만명 이상을 차지하고 아프리카 10만8000명,유럽 75만7000명,서반구 38만200명,오세아니아 40만7000명 등으로 나와 있다.
중국 혈통이지만 현지 국가의 시민권을 얻은 사람은 화교(華僑)가 아니라 화인(華人)으로 불리는데,이들까지 합치면 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중국인들이 오래 전부터 해외 각지로 나가 산 것은 분명하지만,화교 수가 이렇게 많아진 것은 그렇게 오래 전 일이 아니다. 16세기께 화교 수는 10만명 정도로 추산한다. 해외로 중국인들이 대거 나간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다. 내부 혼란으로 중국 경제가 붕괴 지경에 이르고,동남아시아에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 경제를 발전시키며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한 상황이 겹쳤기 때문이다.
중국 남부의 광둥성과 푸젠성은 경작지가 협소한 데다 인구 과잉 상태였기 때문에 이곳 주민들 중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20세기 초 화교 수는 700만명이었다가 20세기 중엽에 1400만명으로 증가하고 20세기 말에 4000만명을 넘보게 된 것이다.
처음 해외로 나간 사람들은 쿨리(苦力)라 불리는 하급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화교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만들어져 이들이 모두 부유한 상인인 것 같지만,실제로는 작은 상점 주인이나 노동자들이 훨씬 많다. 제3세계 거주 화교들은 결코 부유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많은 화교들이 현지에서 확실하게 기반을 잡았고,또 일부가 사업에 크게 성공해 상권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화교가 전체 인구의 5%가 안 되지만 이 나라 개인 자본의 70%,200대 기업의 75%를 차지한다. 태국에서는 전체 인구의 10% 정도인 화교가 주요 은행을 지배하고 있다. 이 정도는 아니라 해도 많은 나라에서 화교들이 경제의 특정 부문을 독차지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타운,페루의 수도 리마 같은 곳에서도 화교들이 소매상점,백화점,식당 등을 거의 장악하고 있다.
외부 사람들이 볼 때 화교들은 다 똑같은 중국인으로 보일 테지만,사실 내부적으로 그들 간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서로 언어도 통하지 않고,사업상 상호 배타적인 조직을 운영하기 십상이다. 원래 출신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캐나다,남미 지역의 화교들은 광둥성 출신이 대다수인 반면 필리핀,말레이시아,싱가포르는 푸젠성 출신이 대부분이다.
화교들의 특징은 같은 고향 사람들 혹은 동성(同姓) 친족끼리 각종 조직을 만들어 사업을 운영하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화교들이 운영하는 조직은 8000개 이상이며 대부분의 화교들은 이 가운데 몇 개에 가입해 활동한다고 한다.
이처럼 화교들이 그들 간의 조직을 만들고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데 온 힘을 쏟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들의 고국이 정치적 보호망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화(鄭和)의 원정 이후 시작된 중국의 해금(海禁) 정책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근대 이후 중국 당국은 공식적으로 대외 관계에 부정적이었다. 19세기에 제국주의 침략을 당하고,20세기에는 공산혁명이 일어나면서 중국의 내향성 혹은 대외 기피증은 더 심해졌다.
그토록 많은 중국인들이 해외에 나가 살지만 정작 본국 정부가 이들을 방치하다 보니 부유한 중국 상인들과 가게들은 걸핏하면 약탈당하고,말레이시아의 부미푸트라(抑華扶馬 · 화교 세력을 억압하고 말레이계 토착민을 우대함) 같은 현지 국가의 압박을 받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화교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생존 전략을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활한 토끼는 3개의 굴을 가지고 있다(狡兎有三窟)'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철저한 리스크 관리를 하는 한편,그들 간 협력 관계를 강화해 온 것이다.
화교들은 독특한 사업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가장 큰 특징은 가족 중심적 혹은 가부장적 회사 운영 방식이다. 대규모 회사도 가족기업 형태로 운영해서 상장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상표가 없는 경우도 있다. 연장자의 상명하달식 의사 결정,내부 금융,기업의 장자 상속 방식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또 화교들끼리 철저하게 신용을 지켜 수억달러의 공동 투자 사업을 하는데 계약서 없이 식사 자리에서 구두로 결정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외지에서 살아가야 했던 화교들의 특별한 역사적 조건에서 나온 현상이다. 화교들은 현지 사회에 완전히 동화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방인도 아닌 매우 특이한 상태에 있다.
과거에는 절박한 상황에서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형성한 이런 관계망이 역설적으로 지구화 시대에 가장 적합한 유연하고도 효율적인 인적 · 물적 기반이 됐다. 오늘날 중국이 세계화 전략의 중요한 축으로 화교 인력과 자본을 이용하려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화교를 두고 아시아의 유대인이라고 부르지만,아마도 앞으로는 유대인을 두고 서구의 화교라고 부를지 모른다. 이미 현금성 유동자산만 수조달러를 운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화교 세력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제조직으로 비상하는 중이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
중국 혈통이지만 현지 국가의 시민권을 얻은 사람은 화교(華僑)가 아니라 화인(華人)으로 불리는데,이들까지 합치면 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중국인들이 오래 전부터 해외 각지로 나가 산 것은 분명하지만,화교 수가 이렇게 많아진 것은 그렇게 오래 전 일이 아니다. 16세기께 화교 수는 10만명 정도로 추산한다. 해외로 중국인들이 대거 나간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다. 내부 혼란으로 중국 경제가 붕괴 지경에 이르고,동남아시아에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 경제를 발전시키며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한 상황이 겹쳤기 때문이다.
중국 남부의 광둥성과 푸젠성은 경작지가 협소한 데다 인구 과잉 상태였기 때문에 이곳 주민들 중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20세기 초 화교 수는 700만명이었다가 20세기 중엽에 1400만명으로 증가하고 20세기 말에 4000만명을 넘보게 된 것이다.
처음 해외로 나간 사람들은 쿨리(苦力)라 불리는 하급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화교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만들어져 이들이 모두 부유한 상인인 것 같지만,실제로는 작은 상점 주인이나 노동자들이 훨씬 많다. 제3세계 거주 화교들은 결코 부유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많은 화교들이 현지에서 확실하게 기반을 잡았고,또 일부가 사업에 크게 성공해 상권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화교가 전체 인구의 5%가 안 되지만 이 나라 개인 자본의 70%,200대 기업의 75%를 차지한다. 태국에서는 전체 인구의 10% 정도인 화교가 주요 은행을 지배하고 있다. 이 정도는 아니라 해도 많은 나라에서 화교들이 경제의 특정 부문을 독차지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타운,페루의 수도 리마 같은 곳에서도 화교들이 소매상점,백화점,식당 등을 거의 장악하고 있다.
외부 사람들이 볼 때 화교들은 다 똑같은 중국인으로 보일 테지만,사실 내부적으로 그들 간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서로 언어도 통하지 않고,사업상 상호 배타적인 조직을 운영하기 십상이다. 원래 출신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캐나다,남미 지역의 화교들은 광둥성 출신이 대다수인 반면 필리핀,말레이시아,싱가포르는 푸젠성 출신이 대부분이다.
화교들의 특징은 같은 고향 사람들 혹은 동성(同姓) 친족끼리 각종 조직을 만들어 사업을 운영하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화교들이 운영하는 조직은 8000개 이상이며 대부분의 화교들은 이 가운데 몇 개에 가입해 활동한다고 한다.
이처럼 화교들이 그들 간의 조직을 만들고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데 온 힘을 쏟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들의 고국이 정치적 보호망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화(鄭和)의 원정 이후 시작된 중국의 해금(海禁) 정책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근대 이후 중국 당국은 공식적으로 대외 관계에 부정적이었다. 19세기에 제국주의 침략을 당하고,20세기에는 공산혁명이 일어나면서 중국의 내향성 혹은 대외 기피증은 더 심해졌다.
그토록 많은 중국인들이 해외에 나가 살지만 정작 본국 정부가 이들을 방치하다 보니 부유한 중국 상인들과 가게들은 걸핏하면 약탈당하고,말레이시아의 부미푸트라(抑華扶馬 · 화교 세력을 억압하고 말레이계 토착민을 우대함) 같은 현지 국가의 압박을 받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화교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생존 전략을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활한 토끼는 3개의 굴을 가지고 있다(狡兎有三窟)'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철저한 리스크 관리를 하는 한편,그들 간 협력 관계를 강화해 온 것이다.
화교들은 독특한 사업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가장 큰 특징은 가족 중심적 혹은 가부장적 회사 운영 방식이다. 대규모 회사도 가족기업 형태로 운영해서 상장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상표가 없는 경우도 있다. 연장자의 상명하달식 의사 결정,내부 금융,기업의 장자 상속 방식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또 화교들끼리 철저하게 신용을 지켜 수억달러의 공동 투자 사업을 하는데 계약서 없이 식사 자리에서 구두로 결정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외지에서 살아가야 했던 화교들의 특별한 역사적 조건에서 나온 현상이다. 화교들은 현지 사회에 완전히 동화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방인도 아닌 매우 특이한 상태에 있다.
과거에는 절박한 상황에서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형성한 이런 관계망이 역설적으로 지구화 시대에 가장 적합한 유연하고도 효율적인 인적 · 물적 기반이 됐다. 오늘날 중국이 세계화 전략의 중요한 축으로 화교 인력과 자본을 이용하려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화교를 두고 아시아의 유대인이라고 부르지만,아마도 앞으로는 유대인을 두고 서구의 화교라고 부를지 모른다. 이미 현금성 유동자산만 수조달러를 운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화교 세력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제조직으로 비상하는 중이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