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지식경제부 장관을 만나고 모레는 환경부 장관,다음주는 공정거래위원장…."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요즘 부처 장관을 만나느라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정책결정의 최고책임자에게 업계의 애로사항을 전달하고 규제를 풀어달라고 건의하는 생산적 만남이 아니다. "일방적 호출에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나갈 뿐이다. "(대기업 임원)

A기업의 P사장은 얼마전 지방에서 해외 고객들과 회의를 하다 중간에 자리를 떠야 했다. 한 정부 부처의 '장관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P사장이 외국에서 온 손님을 남겨두고 2시간가량 서울 행사장으로 달려간 것은 '얼굴도장'을 찍기 위해서다. 기념 촬영 시간에 장관 뒤쪽에서 보도자료용 '인증' 사진을 찍은 뒤 P사장은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고객들과 미팅을 이어갔다.


◆"기념 촬영하는데 장관이 부르면 가야죠"

기업들이 각 부처의 전시 행정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1분1초가 아까운 CEO들이 알맹이 없는 행사에 얼굴을 비쳐야 하는 일이 부쩍 잦아지고 있다. 지식경제부, 환경부,공정거래위원회 등이 동반성장,온실가스감축 및 녹색성장,물가안정,자유무역협정(FTA) 등을 테마로 각종 협약식과 간담회를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만들어내고 있는 탓이다.

이만의 환경부 장관은 지난달 20일 서울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31개 기업 대표와 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녹색구매 자발적 협약식'을 가졌다. 이어 26일에는 서울 르네상스호텔에서 31개 대기업과 78개 중소기업 대표를 불러놓고 '환경기업 동반성장 결의대회'를 가졌다. 지난 4일 환경부와 KB국민카드가 그린카드 업무제휴 협약을 맺는 행사에도 30여개 기업 대표들이 참석했다. 지방소재 기업의 CEO는 사진을 찍기 위해 몇시간을 달려와야 했다.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오는 23일 자동차와 부품업계 대표를 초청,업계 동향과 동반성장을 주제로 정책간담회를 가질 예정이다. 최 장관은 그 다음날엔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대표들을 불러 놓고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녹색성장 · 동반성장 간담회'를 주재한다. 지경부는 이달 말 30대그룹 임원을 대상으로 동반성장 간담회를 한 차례 더 가질 예정이다.

◆"대책없는 대책회의 왜 하나"

B기업의 S사장은 1주일에 한두 차례,많으면 두세 차례 정부 부처 장 · 차관들의 호출에 불려다닌다. 이 회사의 임원은"CEO의 스케줄을 짤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하는 것이 정부 주최 행사"라며 "사장 대신에 부사장이나 전무급이 나가면 괘씸죄로 찍힐까봐 거의 사장들이 직접 참석한다"고 전했다.

CEO들은 장 · 차관 호출에 불려다니지만 임원들은 실 · 국장 주재 회의 때문에 일할 시간이 없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C기업의 한 임원은 "동반성장이나 FTA,수출전략 등에 관한 회의가 너무 자주 열려 업무를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라고 전했다.

그는 "그 중에서도 지경부의 수출전략회의가 압권"이라며 "유가나 원자재 가격이 올라도 회의,내려도 회의를 한다"며 "뾰족한 지원책이 없는데도 가격이 요동칠 때마다 회의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이에 대해 정부 부처의 한 관계자는 "업계와 소통을 확대하는 과정이 기업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면서도 "그렇다고 공무원이 가만히 앉아 있을수는 없지 않으냐"고 했다.

재계 관계자는 "매년 국정감사 때는 국회가 대기업 총수나 CEO를 무턱대고 증인이나 참고인으로 소환하는 통에 기업들이 속을 끓이고 있다"며 "장 · 차관의 잦은 호출도 기업인들을 어렵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장진모/김현예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