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리예술마을.경기도 파주에 있는 국내 최대 문화예술마을이다. 넓이가 약 50만㎡에 이른다. 380여명의 예술ㆍ문화인들이 회원으로 참여해 1998년부터 조성하기 시작해 약 160동의 건물이 들어섰다. 이 지역 전래 농요인 '헤이리 소리'에서 따온 이곳에는 수많은 갤러리ㆍ박물관ㆍ전시관ㆍ공연장ㆍ소극장ㆍ카페ㆍ레스토랑ㆍ서점ㆍ아트숍과 예술인들의 창작ㆍ주거공간이 있다. 건축물은 구릉과 연못 개천 등 자연환경을 살려 설계했다. 이곳에 또 다른 특이한 공간이 지난 5월 초 문을 열었다. 갤러리화이트블럭이다.

헤이리 중심 연못 앞에 자리잡은 갤러리화이트블럭은 몇 가지 점에서 특이하다. 대부분의 이곳 건축물은 노출 콘크리트로 지어졌다. 하지만 이 갤러리는 외벽이 통짜 유리와 흰색으로 돼 있다. 밖에서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뿐 아니라 밖의 연못과 숲은 그대로 안으로 투영된다. 푸른 녹음과 어우러진 연못은 모네의 수련을 연상시킨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젊은 건축가 박진희 씨가 설계한 건축물이다. 서울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뒤 하버드대에서 건축학 석사학위를 딴 박씨는 뉴욕건축연맹으로부터 2007년 젊은 건축가상과 2009년 미국건축사협회로부터 젊은건축가상을 받았다. 건축설계회사 SsD를 이끌고 있으며 세계 건축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헤이리에서는 이 건물을 기존 건축물에 대한 '반란'으로 규정한다. 노출 콘크리트라는 엄격한 기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건물만 특이한 게 아니다. 갤러리는 미술품을 전시 · 판매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미술품만 전시하는 게 아니다. 음악 퍼포먼스 공연 등이 어우러지는 공간이다. 3층 규모의 갤러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공연장이다. 가운데가 3층까지 뚫려 있을 뿐 아니라 소리의 울림도 좋다. 클래식이나 오페라 갈라콘서트,밴드 공연에 적격이다.

이수문 갤러리화이트블럭 대표(63)는 이런 것을 감안해 설계안을 선택했다. 한마디로 퓨전이요,통섭이다. 갤러리 밖의 작은 언덕은 관객들이 앉으면 바로 객석이 된다. 안과 밖,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는 특이한 공간이다. 지난 5월14일부터 6월12일까지 약 한 달간 이어지고 있는 '제3회 아트 로드(ArtRoad)77 아트페어'의 중심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한국 미술계의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어갈 77명의 청년작가를 선정하고 그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청년작가전'과 예술적 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한 중견작가들이 후배 작가들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한 '예술 · 나눔;중견작가 기부전' 등이 열리고 있다.

이 대표는 제조업 경험을 살려 이 갤러리를 경쟁력 있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레인지후드 업체 하츠를 창업해 20년간 경영한 경험을 토대로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새로운 장르의 개척이다. 제조업으로 따지면 신제품 개발이다. 갤러리에 무슨 신제품이 있을까. 제조업체는 늘 신제품 개발에 몰두한다. 미술과 음악 연극을 결합한 공연을 기획 중인 것도 이 같은 구상에 따른 것이다. 미술 음악 공연이 각각 다른 장르로 독립될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대표는 "미술관에서 아름다운 회화와 조각 작품을 배경으로 현악 4중주가 울려퍼지고 동시에 춤사위가 펼쳐지는 것을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상품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헤이리는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데 이들이 새로운 장르를 체험하면 이보다 더 좋은 관광상품이 있겠는가"라고 생각한다. 마치 난타와 같은 새로운 장르의 퍼포먼스가 한국의 간판 관광상품으로 자리잡았듯 갤러리와 공연을 결합하면 새로운 상품이 탄생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둘째,디자인 경영이다. 하츠를 경영하면서 품질 못지않게 디자인에 정성을 쏟았다. 음식 냄새를 밖으로 배출하는 레인지후드는 모양에 상관없이 성능만 좋으면 오케이였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아름다운 디자인을 개발해 접목시켰다. 자체 디자인팀을 통한 개발은 물론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손잡고 새로운 디자인을 속속 선보였다. 그가 갤러리 건물에 신경을 쓴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자체가 예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셋째,투명 경영과 사회적 책임 완수다. 제조업 경영은 1 더하기 1은 2다. 원재료 인건비 관리비를 합쳐 원가가 나오고 적정 이윤을 붙여 판다. 원가 구조가 명확하다. 갤러리도 이런 식으로 투명하게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부유층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중산층 관람객들도 살 수 있는 가격대의 작품도 다수 취급할 생각이다. 아울러 신진 화가 발굴과 육성은 사회적 책임이라는 측면을 갖고 있다. 이 대표는 "톱클래스 국내외 작가들의 굵직한 전시회를 연 4~5회 개최하되 그에 못지않게 젊은 작가를 중점적으로 발굴해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

이 대표가 새로운 문화 창조를 시도하는 것은 그의 인생 역정과 맞물려 있다. 경기중 · 고와 서울대 공대(건축공학과)를 나온 그는 중 · 고교 시절부터 밴드부와 연극반에서 활동했고 대학교를 다닐 때도 공대 연극반에서 활동했다. 밴드부에서는 클라리넷을 불었고 연극반에서는 배우로 활동했을 뿐 아니라 무대장치 음악 음향 조명 등에 관여했다. 그는 경기고 밴드부 출신 70여명이 모인 시니어앙상블의 회장을 맡아 이를 이끌었다. 신구 한진희 정한용 씨 등 경기고 출신 연극인 모임인 화동연우회의 총제작을 맡고 있기도 하다.

대학 졸업 후 가구업체 한샘과 현대종합목재에서의 16년간 월급쟁이 생활을 한 뒤 레인지후드 업체 하츠를 창업해 국산 제품의 품질과 디자인을 한 단계 격상시키며 20년 동안 경영해왔다. 문화에 대한 끼는 하츠를 경영하면서도 나타났다. 음악 연극 등에 심취해 있던 그는 "우리나라 사람처럼 음악과 신명나는 공연에 타고난 재질을 가진 사람도 드문데 왜 창작 뮤지컬이 없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당시 세계 공연예술계는 '캐츠' '미스사이공''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등 뮤지컬이 휩쓸고 있었다.

고심하던 그는 창작 뮤지컬 제작에 도전하기로 하고 작가 연출가 음악인 등을 섭외했다. 주머니 돈을 털고 한샘 조창걸 사장(당시)의 지원을 받아 이문열 작가,윤호진 연출가와 합의한 뒤 약관의 박칼린 음악감독을 대동하고 1993년 한 달 동안 뮤지컬의 본고장 런던 웨스트엔드와 미국 브로드웨이 등에서 자료를 수집했다. 이런 노력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다. 일종의 산파 역을 담당한 것이다.

하츠 매각 후 문화사업에 뛰어든 이 대표는 우선 갤러리를 제 궤도에 올려 놓은 뒤 헤이리 전체의 활성화 방안을 찾는 데도 힘을 보탤 생각이다. 헤이리에는 주말에 많은 사람들이 오지만 문화 예술에 대한 깊이있는 음미보다는 한번 휙 둘러보고 차 한잔 마시거나 점심식사를 한 뒤 서둘러 돌아간다. 이들이 진정한 예술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일까 하는 게 그의 또 다른 과제다. 헤이리가 품격 있는 예술의 보금자리로 자리잡는 데 이대표가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