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에서 5 · 16만큼이나 치열한 논쟁을 불러온 사건도 드물다. 5 · 16을 평가절하하는 쪽은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든다. 하나는 4 · 19혁명의 결과를 부인했고 정상적인 민주국가로의 이행을 저지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5 · 16이 아니었더라도 지금과 같은 경제발전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5 · 16 군사혁명으로 헌정이 중단됐고 결과적으로 유신을 거쳐 18년간 독재정권이 이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4 · 19 이후 성립된 장면 정부가 과연 민주화와 근대화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나갈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적지않은 의문이 드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사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후진국 중 민주화와 산업화에서 모두 성공한 나라는 한국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는 것이 국제적인 평가들이다. 근대화를 형성해나갈 인적 물적 토대가 절대 부족한 탓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나마 근대적인 행정 시스템을 갖춘 집단이라면 미군 행정을 받아들인 군대 정도가 유일했다. 쿠데타라는 방식은 분명 유감이었지만 5 · 16을 통해 한국사회가 본격적인 산업화의 길로 들어섰다는 역사적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경제적 성과에 대한 논란도 마찬가지다. 장면 정부 역시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극심한 사회혼란을 겪었던 2공화국이 중화학공업 육성이나 경부고속도로 건설,수출 진흥 등에서 성공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다. 5 · 16을 통해 지배 엘리트 집단이 형성됐고 권위주의에 기반한 강제력이 자본과 노동의 전면적 투입을 가능케 했던 일련의 맥락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50년이 지난 지금 중요한 것은 이런 5 · 16의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일이다. 일부 대중민주주의에 함몰돼 있는 듯한 정치현실은 보다 성숙한 서구형 시민 민주주의로 이행해가야 하고 경제 역시 외형적 성장에서 벗어나 보다 질적으로 성숙한 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치 이항대립 구조처럼 인식돼왔던 4 · 19와 5 · 16이 비로소 자랑스런 역사의 발전 단계들로 통합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