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화 명작 기행] 코발트빛 제국 하늘에 우뚝 솟은 황제의 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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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트 개트너의 '모스크바 크렘린의 파노라마'
금빛 돔과 흰색 외벽의 종탑…아라비아 모스크 연상
낮은 소실점의 네덜란드풍 투시법…이국적 느낌·宮의 웅장함 드러내
금빛 돔과 흰색 외벽의 종탑…아라비아 모스크 연상
낮은 소실점의 네덜란드풍 투시법…이국적 느낌·宮의 웅장함 드러내
독일은 18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문화의 변방으로 취급받았다. 늘 중부 유럽으로부터 불어오는 문화의 훈풍을 수용하기만 했지 그곳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래서일까. 독일의 군주나 귀족들은 자국 문화에 대한 자격지심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곧잘 자국 예술가들에 대한 무시와 이탈리아 및 프랑스 예술가들에 대한 과잉 환대로 나타났다.
그러나 독일 예술가들이 무시만 당했던 것은 아니었다. 안방에서는 찬밥신세였지만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 나라들에는 무시못할 문화 · 예술 선진국으로 비쳐졌다. 독일 문화 수입에 가장 의욕적으로 덤빈 건 러시아였다.
아시아의 일원에서 선진문명의 바람이 불어오는 유럽 리더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던 로마노프 왕조는 혼인정책으로 주변 국가들과 연대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한편 그것을 서유럽 문화의 수입 창구로 활용했다. 마리아 파브로프나 대공비와 프로이센의 카를 프리드리히 왕세자의 결합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에겐 독일,즉 프로이센만큼 그러한 문화적 교두보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나라는 없었다.
러시아의 수많은 재능꾼들이 뒤셀도르프와 드레스덴으로 몰려 가 게르만화된 서유럽의 예술을 학습했다. 로마시절의 괴테 초상을 그린 티슈바인은 그들에게 우상 같은 존재였다. 러시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독일의 일급 예술가들을 초청해 궁전과 교회 건축을 맡겼고 내부를 장식할 회화와 조각 작품을 주문했다.
화가 포겔스타인(1788~1868)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가린 왕자궁에 머물며 귀족들의 초상화를 대거 제작했고 건축가 겸 화가 레오 폰 클렌체는 에르미타주의 확장 공사를 맡았다. 또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은 페테르호프 궁 지하 예배당의 설계를 의뢰받았다.
사실 러시아의 독일 예술가 초청은 그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생각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러시아 문화의 진가가 알려지면서 만년 문화 수입국의 불명예에서 벗어나 서유럽 세계에 유사 이래 처음으로 문화적 영향을 미치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은 문학의 영역이었다. 푸시킨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 독일어로 번역 출판되면서 독일의 문학애호가들은 후진국으로만 알았던 이웃나라의 예기치 못한 문화적 저력에 전율했다. 러시아 예술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담긴 보편적 가치에 감동한 시인 릴케는 모스크바로 달려가 문호 톨스토이와 화가 레오니드 파스테르냑을 만날 정도였다.
화가들도 러시아에 매혹되긴 마찬가지였다. 에두아르트 개트너(1801~1877)의 스승인 카를 그로피우스는 비잔틴 양식과 이슬람 양식이 결합된 크렘린의 궁과 교회들이 자아내는 이국적 풍경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모스크바 왕립극장의 감독관으로 일하던 그는 세밀 묘사에 능했던 제자를 모스크바로 불러들여 크렘린의 파노라마적 풍경을 세 폭의 나무 패널 위에 제작해 달라고 주문했다.
베를린 아카데미 출신인 개트너는 사실적인 도시 풍경화로 명성을 구가하던 화가로 프로이센의 빌헬름 3세와 러시아의 니콜라스 1세 황제가 후원에 나설 만큼 발군의 기량을 지닌 인물이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개트너 역시 스승처럼 러시아 문화에 깊이 빠져들었다.
크렘린 궁의 중앙에 선 개트너의 눈에 들어온 파노라마적 풍경은 서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이국적 풍취로 가득한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 기념비적 풍경을 세 폭의 패널에 효과적으로 담을까 고민한 끝에 중앙에는 이반 대제 종탑,왼쪽 날개에는 미카엘 대천사 교회와 그 뒤로 전개되는 크렘린 성벽과 도시의 풍경,오른쪽 날개에는 성모승천 교회와 스파스카야 시계탑의 단아한 자태를 그려 넣기로 결정했다.
세 개의 패널화 중 우리의 시선을 자극하는 것은 아무래도 100m 높이로 우뚝 선 이반 대제 종탑을 그려 넣은 중앙의 패널이라고 할 수 있다. 정상부의 금빛 찬란한 돔과 흰색의 외벽이 아라비아의 모스크를 연상시키는 이 탑은 외침과 같은 비상사태가 발생할 때면 탑 안의 종 21개를 울려 위기 상황을 사방에 알렸다고 한다.
탑 왼쪽에 보이는 키 작은 건물은 성모승천 교회로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던 곳이었다. 작품의 이국적인 느낌은 낮은 소실점을 갖는 네덜란드 풍의 투시법에 의해 더욱 강화되고 있고 이는 황제의 거처로서의 크렘린 궁의 위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코발트빛을 띠고 있는 드넓은 하늘은 페르시아 특유의 회회청(回回靑 · 이란 특산의 청색 안료로 금값보다 비쌌다고 한다)을 연상케 하며 이 역시 그림에 아라비아적 정서를 환기하는 시각적 촉매가 되고 있다.
릴케를 비롯한 독일 문학가들에 의해 러시아의 정신적 유산이 서구에 알려졌다면 러시아의 이국적 문화 예술의 존재를 서방에 알린 것은 독일 화가와 건축가들이었다. 개트너는 그런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던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20세기 초부터 본격화된 현대미술의 주요한 흐름을 칸딘스키 · 말레비치 같은 러시아 화가들이 담당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