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홍천 11사단 군수참모부.군수품 이송계획 등을 짜는 것이 주 임무였던 이등병 김용환에게 위기가 닥쳤다. 입대한 지 몇 달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사수'가 당초 예상보다 일찍 제대한 것.사수가 없으니 편하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였다. 졸지에 작대기 하나 이등병이 다른 부대원들까지 지휘하는 자리에 서게 됐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쫄따구가 뭘 믿고 이래라 저래라냐"며 무시하는 이들이 허다했다.

그는 꾀를 냈다. 모자에 달린 이등병 마크를 떼고 작대기 네 개 병장 마크를 달았다. 타 부대에 가서는 관등성명도 당당하게 "병장 김!용!환!"이라고 외쳤다. 그는 "작대기 하나로는 영(令)이 안 서니 병장 마크를 달고 병장인 척하고 다닌 것"이라고 했다.


◆부드러운 이미지 속에 숨겨진 '깡'

까만 뿔테 안경은 김용환 수출입은행장(59)의 트레이드 마크다. 1980년대 유행한 장발 헤어 스타일을 지금껏 고수하고 있다. 얼핏 보면 공부 잘하는 고시생 같아 보이기도 한다. 부드럽고 조용한 이미지 때문에 '영국 신사'라는 평을 듣는 때가 많다. 하지만 그와 오랫동안 함께한 사람들은 "겉보기와 달리 '깡'이 있다"고 한다. 병장 마크를 단 이등병 노릇은 그런 일단을 보여주는 일화다.

김 행장은 "나는 외향적이고 도전을 즐기는 편"이라고 스스로를 평한다. 충남 보령 출신으로 서울고에 진학한 김 행장은 법대 지망생이었다. 고교 시절부터 서울에 유학을 와 하숙생활을 하던 그의 마음 속에는 사법고시를 봐 율사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는 "처음 꿈이 율사였던 때문인지 법을 중시하는 게 몸에 배어 있다"며 "무슨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법전부터 찾아보는 게 습관"이라고 했다.

재수를 거쳐 1972년 성균관대 경제학과에 진학한 그는 행시로 방향을 틀었다. "이왕에 경제학을 전공하게 됐으니 재무부 공무원이 돼 나라를 이끌어 보자"는 포부였다. 공부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합격(23회)했다.

◆80년대 '글로벌 협상가'

1980년 재무부에 들어간 그는 7년간 외환정책과에서 근무했다. 동기 20여명 중 김석동 금융위원장,이주형 수협은행장이 그와 함께 외환정책과에서 일했다. 이정재 전 금융감독위원장이 당시 외환정책과장이었다. 양천식 전 수출입은행장과 김용덕 전 금융감독위원장이 선배 사무관으로 같이 근무했다.

김 행장은 "국제금융 쪽에서 시작할 수 있었던 게 큰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당시로선 드물게 외국인들과 접촉할 일이 잦아 글로벌한 시각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맥쿼리를 비롯해 JP모건,뱅크오브아메리카(BOA) 등 외국계 투자은행(IB) 관계자들과 인맥을 쌓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어 증권국으로 옮긴 그는 1988년 발표한 자본시장 개방 5개년 계획의 밑그림을 그렸다. 당시 은행 · 보험은 시장을 개방한 상태였고 외국인 주식투자를 허용하라는 미국의 자본시장 개방 요구가 거셌다.

김 행장은 "점차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포지션으로 조금씩 문을 열어줬는데,그때 쌓은 인맥이나 협상 경험이 이후 금융감독위원회나 수출입은행장 일을 할 때 굉장히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형식 따지는 리더십은 질색

김 행장은 원칙을 중시한다. 관계 법령은 직접 꼼꼼히 다 찾아본다. 즉흥적으로 또는 감정적으로 일을 하는 것은 매우 싫어한다.

그는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 시절 금융회사 검사를 나간 직원들이 모 은행에서 40여명을 잡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절반 가까이를 풀어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검사 대상 금융회사가 아무리 못마땅해도 미리 (절차상 규정대로) 주의를 주지 않고 갑자기 잡아들이는 것은 권력 남용이라는 게 그의 소신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어디까지나 업무를 볼 때의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그는 털털하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옛 재무부 관료를 일컫는 '모피아'답지 않게 상대의 고향이나 출신 대학 등 이른바 '족보'에 둔감한 편이다. "들어도 잘 잊어버려서…"라는 게 그의 얘기다. 지연이나 학연은 무시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다. 그는 "그래도 상대방 정보를 기억하는 게 예의인데 너무 잘 못하는 것 같아서 앞으로는 좀 노력하려고 한다"고 했다.

형식을 따지는 일은 극도로 싫어한다. 기자들과 만날 때도 대변인이나 공보 담당자를 대동하지 않고 편하게 만나는 것을 즐긴다. 기자들과 약속을 잡는 것조차 직접 하는 통에 공보실에서 곤란을 느낄 때도 있다. 그는 아무리 일이 많아도 집에까지 일을 가져가지 않는다. "찜찜해서 싫다"는 이유에서다.

◆"수은 관료 색깔 빼겠다"

김 행장이 지난 3월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에서 수출입은행장으로 자리를 옮겨 가장 먼저 바꾼 것 중 하나는 '스피드'다. "문서를 예쁘게 갖춰 보고하고 결재받으려고 하지 말고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실무자가 직접 나한테 전화하라고 했다"는 것."행장 면담자료도 10장,20장으로 만들지 말고 1장,2장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는 "누가 자리를 비우면 일이 안 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은 딱 질색"이라며 "폼 잡는 리더십 말고 형식보다 실질을 중시하라는 게 내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수출입은행의 '관료적 색채'를 빼는 것도 그의 몫이다. 김 행장은 "우리가 똑바로만 한다면 수출입은행에는 할 일이 굉장히 많다"며 "글로벌 투자은행으로서의 역할도 해야 하는데 목에 힘을 줘서는 도저히 민간 IB들과 경쟁할 수 없다"는 얘기다. 수출입은행의 역할을 바꾸기 위해 관련법을 개정하는 것도 그의 중점 과제다.

직원들과의 접촉 기회도 대폭 늘릴 계획이다. 그는 "직원들이 일을 신나게 했으면 좋겠다"며 "해피 바이러스라고 해서 오후 4시께 간식을 먹으며 직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는 방안을 구상 중"이라고 했다. 사업본부끼리 행장배 축구대회도 개최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