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학책으로만 학생을 가르치는 의대 교수가 있습니까. 이공계 대학에선 교재만 들여다보다 끝나는 수업이 수두룩해요. 기업들이 '대학에서 도대체 뭘 가르치는 거냐'며 불만을 토로하는 게 당연합니다. "(성관제 동국대 기계로봇에너지공학과 교수)

기업이 필요로 하는 우수 이공계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선 실험 · 실습에 필요한 장비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취약한 교육 인프라가 예비 산업 인력인 이공계 학생의 학업 성취도와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다.

◆없거나 낡았거나 모자라거나

모 대학에서 안테나공학을 가르치는 A교수는 올해 이론 2학점,설계 1학점으로 이뤄진 마이크로파 공학 수업을 개설했지만 책으로만 강의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교내에 안테나에서 나오는 전파를 측정하는 장비가 없어 설계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A교수는 "읽고 듣기만 하는 수업에서 공대생들이 뭘 배워 나갈지 회의감마저 든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학의 반도체학과 수업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0여년 전 구입한 반도체 노광 장치 두 대 중 하나는 유지 · 보수할 여력이 없어 실습실 한쪽에 방치해뒀고 나머지 한 대는 전체 수강생 20여명 가운데 고작 4~5명만이 사용했다. 다른 학생들은 멀뚱히 서서 쳐다보기만 한다는 얘기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한국공학교육인증원이 2001년 도입한 공학교육인증제도 무용론도 제기되고 있다. 인증제의 핵심인 설계 과목을 엉터리로 진행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데다 이를 제대로 감독할 만한 수단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방의 한 공대에선 설계 과정이 포함돼 있는 26개 수업 가운데 실제로 설계가 이뤄지는 과목은 단 10개에 불과했다. 나머지 수업들은 이론만 가르치고도 버젓이 공학인증을 내주고 있는 셈이다.

◆교육용 기자재엔 지원 없다

대학 관계자들은 교육용 기자재가 열악한 이유가 1990년대 이후 중단된 정부 지원사업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는 1993년 세계은행의 차관을 들여와 대학에 기자재를 제공한 것을 끝으로 공식적인 지원을 중단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2004년부터 5년 동안 총 1조4200억원을 들여 지방대 육성을 골자로 벌인 'NURI사업(지방대학 혁신역량 강화사업)'도 대학들이 기자재를 사는 데 쓸 수 있는 돈은 전체의 10% 미만이었다. 성 교수는 "NURI나 BK21과 같은 국책 사업은 석사 장학금 등 인건비 지급에만 치우친 경향이 있다"며 "교육 인프라는 개선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등록금만 쥐어주는 건 이공계 육성에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지적했다.

교육용 기자재보다 교수 개인이나 대학원생만을 위한 연구 · 개발(R&D)용 장비부터 들여놓는 관행도 대학들이 바로잡아야 할 과제다. 박주성 부산대 전자공학과 교수가 지난해 서울 소재 7개 공대 교수 28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의 72%가 교육용 기자재를 언제 구입했는지도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학근 동국대 공대 학장은 "대학 평가에도 실험 · 실습 장비는 평가 항목에 없어 교수들도 신경 쓰지 않는다"며 "그렇다 보니 당장 연구 성과를 낼 수 있는 R&D용 기자재에 욕심을 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공과대학장협의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한 해 평균 3억원 이상을 교육용 기자재를 사는 데 투자한 대학은 전체의 10%가 채 안 되는 것으로 집계됐다.

하헌형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