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심한 양극화 장세에 펀드수익률 상대적 부진
- "저평가 중소형 가치주로 시장 관심 돌아설 것"


"펀드투자자님, 죄송합니다"

대한민국 대표 가치투자 대가 허남권 신영자산운용 자산운용본부장이 25일 펀드 투자자와 판매사인 증권사에 반성문 성격의 편지를 보내 시장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최근 코스피지수가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을 걷고 있는 상황에서 철저히 소외돼온 가치투자의 비통함과 회한이 뚝뚝 뭍어나는 편지를 꾹꾹 눌러 썼다.
'뚝심맨' 허남권 "죄송합니다"…펀드 투자자에 반성문 써

허 본부장은 국내 가치투자 펀드의 원조 격인 '신영마라톤증권투자신탁'을 누적수익률 300%라는 경이적인 수익률로 성공반열에 올려놓은 스타 펀드매니저다.

실제 '신영마라톤증권투자신탁'의 설정 이후 수익률은 지난달 25일 기준 무려 305.52%에 달하며 변동성 큰 시장 상황에서도 꾸준히 우수한 성과를 자랑해 왔다.

하지만 최근 1년 간은 국내 주식형 펀드 중에서 하위권이다.

한 회사에서 15년동안 '뚝심'으로 자리를 지켜온 허 본부장도 지금과 같은 극심한 차별화 장세에서는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 셈이다.

지난 19일 기준 신영마라톤증권투지신탁의 1년 누적 수익률은 20.46%로 벤치마크 24.20%를 밑돌고 있다.

통상 자산운용보고서가 운용사와 펀드투자자 간 소통창구로 활용돼온 점에 비춰 볼때 이처럼 별도의 편지로 투자자에게 다가서는 것은 이례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만큼 최근 강세장에서도 가치투자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라는 것이 시장 참여자들의 해석이다.

자산운용업계에서는 중소형 가치주를 편입하는 운용사들의 성적표가 극히 부진한 이유를 외국인의 '러브콜'을 받은 일부 대형주 위주의 극심한 차별화 장세에서 찾고 있다.

가치투자를 믿고 투자에 나선 펀드투자자도 코스피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가운데 자신의 저조한 펀드 수익률에 화가 단단히 날 수밖에 없다는 것.

허 본부장은 이 편지에서 "1996년 설립 이래 묵묵히 가치투자의 외길만을 걸어온 신영자산운용의 대표펀드인 신영마라톤펀드는 국내 저평가된 가치주식을 발굴·투자해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펀드로써 2002년 설정 이후 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관된 원칙으로 운용되고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1년간 펀드의 성적이 부진해 많은 판매자와 고객들께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고개를 떨궜다.

펀드 수익률 부진 이유로 주식시장의 양극화 심화를 꼽았다.

허 본부장은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가 국내 간판 수출기업들에게는 오히려 큰 기회가 됐고, 특히 자동차와 화학업종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져 이들 업종의 기업들은 지난 2년 간 급격한 성장을 보였다"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투자자금들이 해외로 눈길을 돌리면서 국내 주식시장에도 대규모로 외국인 투자자금이 유입된 반면 국내 주식형 펀드에서는 주식시장이 회복됨에 따라 꾸준히 환매가 일어났고 일부는 자문사 랩 어카운트를 비롯한 집중 투자형 상품에 유입됐다"고 설명했다.

이는 주식시장에서 일부 업종의 대형주에 대한 투자 집중화를 야기했고 여타 종목들은 관심의 밖에 놓이게 하는 결정타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그는 "이러한 양극화는 올해 들어 더욱 심해지고 있다"며 "물론 우수한 경영성과를 보이고 있는 대기업들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극단적인 양극화로 인한 쏠림은 반대 측면에서의 시장 왜곡을 야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우량한 경영성과를 보이고 있는 저평가 가치주들이나 고배당주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낮아져 있는 상황이라는 것.

심지어 대형 우량주들의 우선주들 조차도 보통주에 비해 높은 배당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는 추가적인 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소외 속에 보통주들의 상승률을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운 심경을 토로했다.

허 본부장은 "신영자산운용 펀드는 저평가된 우량 가치주 및 대형 우량주의 우선주를 포함한 고배당주 종목들에 대한 광범위한 분산투자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안정적인 투자성과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지난 1년 여의 주식시장 상황은 이러한 전략으로 운용되는 펀드에는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 펀드는 부진한 성과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재차 고백했다.

하지만 세계 경제와 주식시장의 커다란 변화에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점, 그리고 이에 따른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장기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하지 못한 점은 온전히 저희의 잘못이라고 사과했다.

허 본부장은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들어서는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 속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며 "주도 업종 종목들의 주가 수준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우량한 경영성과를 보이고 있는 저평가 가치주들에 대한 시장의 관심도 서서히 돌아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장기적으로는 최근의 극단적인 쏠림 현상이 완화되면서 저평가 기업들의 왜곡된 주가도 제자리를 찾아갈 것으로 믿는다는 것.

그는 또 "지난 1년 여의 성과 부진 속에서 그 동안의 투자전략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와 반성을 통해 앞으로 기존의 가치투자 철학을 유지하면서도 어떻게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개선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수립했다"며 "이러한 개선책은 지금의 상황이 전례 없는 위기 상황이며 펀드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철저한 상황 인식을 바탕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허 본부장은 "전 운용인력이 대표펀드 성과 개선을 위해 역량을 집중하기 위한 운용구조 합리화 방안과 펀드의 규모에 걸맞는 중대형급 종목들에 대한 분석 강화, 기업 가치분석에 있어 중장기 전망 분석 강화 방안 등이 포함돼 있다"며 "이를 통해 기존의 가치투자 철학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면서도 진일보한 운용방식을 통해 이전의 우수한 성과를 회복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끝을 맺었다.

현재와 같은 극심한 양극화 장세에서 '뚝심맨' 허 본부장이 다시한번 가치주(株) 펀드의 영광을 재현해 낼 수 있을 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한경닷컴 변관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