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이 몸에 딱 맞는 검정색 정장을 입었다. 머리엔 왁스를 발라 멋을 냈고,2층짜리 녹슨 컨테이너가 있는 광장에 서서 슬픔과 자조 섞인 말들을 뱉는다. 고무공을 튕기며 미친 척 장난을 하고,빈 휠체어를 끌고 무대 위를 서성이며 말한다. "죽느냐,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

중세 덴마크 왕가의 고전 비극이 속도감 넘치는 현대극으로 재탄생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지난 8일 개막한 박근형 연출의 '햄릿'은 '비극은 무겁지 않게 희극은 가볍지 않게'라는 연극 속 대사를 그대로 실천했다. 파격적인 연출과 현대적인 복장,위트 넘치는 대사는 관객들을 100분 동안 쉴 틈 없이 극에 몰입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버지인 왕을 죽인 것도 모자라 장례를 치른 지 얼마 안돼 어머니와 결혼식을 치르고 왕이 된 숙부.아버지의 혼령이 나타나 햄릿에게 '그 독사에게 복수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햄릿은 숙부의 양심을 시험하고 그의 죄를 재확인하기 위해 살해 당시를 재현한 연극을 꾸민다. 자신의 죄를 햄릿에게 들킨 숙부는 햄릿을 죽이기 위해 계략을 짠다. 누구나 아는 고전 비극인데도 관객들은 웃다가 울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극중극 형태의 연극은 남자가 왕비,여자가 왕을 연기하며 폭소에 정점을 찍었다.

대사도 톡톡 튄다. 뼈 있는 말들도 꿈틀댄다. 햄릿은 '인간의 초석은 이빨이야,국가의 초석이 백성이듯'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살인을 재현하는 연극을 본 왕(클로디어스)이 '광대는 이 시대의 암이야'라고 말하자 연극 배우들은 '권력은 이 시대의 종양이지'라고 곧바로 맞받아친다. 어머니(거투르드)가 아프다는 말을 들은 햄릿이 '왜,방사능 분진이라도 맞았나보지?'라며 비웃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박수를 쳤다.

무대는 단순하지만 영리하게 구성됐고,소품은 비극의 분위기를 가볍게 환기시켰다. 조명은 햄릿의 복잡한 심경을 나타낼 때는 붉고 푸른 빛을 내다가 죄를 짓고도 평온하게 지내는 왕을 비출 땐 은은한 백색 조명으로 바뀌었다.

이충한 음악감독의 선율도 궁합이 잘 맞았다. 비장한 장면에서는 웅장한 음악으로 긴장감을 조성하다가 오필리아나 간신 폴로니우스가 죽었을 때는 현악기와 건반으로 슬픔을 강조한다.

결말은 원작과 다르다. 다 죽고 악(惡)만 살아남는다. 죽어가는 선(善)은 이 비극이 누구의 탓도 아닌 '불온한 시대의 탓'이라고 돌린다. 극중에서 햄릿이 '연극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한 것처럼 악은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지금 우리에게 정의를 가져다 줄 '새로운 햄릿'이 나타날 때라고 극은 역설한다. 그래서 박근형이 만든 '햄릿'은 누구에게는 비극이고 누구에게는 희극으로 남는다. 24일까지.(02)399-1114~6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