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번 대지진은 일본만의 장점 못지않게,고유한 한계 또한 분명히 확인시켜줬다. 평상시 장점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던 단점들이 국가적 위기를 맞아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가장 치명적인 건 비상 시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정치시스템이다. 간 나오토 총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확대 일로를 걷던 지난달 14일 헬리콥터가 상공에서 원자로에 냉각수를 뿌리는 작전을 자위대에 '요청'했다. 그러나 기타자와 도시미 방위상과 오리키 료이치 통합막료장(합참의장)은 "자위대원에게 너무 위험한 작전"이라며 거절했다. 결국 수시간의 설득 끝에 방위상과 합의하고,통합막료장의 결심을 얻어 작전을 실행시켰다.
형식상 자위대의 최고 지휘권자는 총리이지만,권력이 분산되고 유동적인 의원내각제 체제에서 일본 총리는 자위대에 강력한 명령권을 발동하지 못했다. 한국과 같은 대통령제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본 정치시스템에선 공공연히 벌어졌다.
둘째,매뉴얼 맹종에 따른 융통성 부족이다. 매뉴얼을 철저히 지키도록 훈련받은 일본인들은 매뉴얼 기준을 넘어선 규모 9.0의 초강진과 수십m로 밀려든 쓰나미에는 속수무책이었다. 한국인의 감각으론 기존 매뉴얼을 응용해 대응하고,임기응변으로라도 대처하는 게 상식이지만 일본인은 그렇지 못했다. 예컨대 100명의 이재민이 있는 피난소에 95개의 빵이 구호품으로 오면 현장에선 배급을 하지 않고,5개가 더 올 때까지 기다렸다. 구호품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나눠주라고 매뉴얼에 적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지진이 발생한지 3주일이 지났지만,아직도 따듯한 밥 세 끼를 못 먹는 이재민이 70%에 달한다.
셋째,곳곳에 뿌리 내린 관료주의다. 원전 폭발 등 국가적 재난이 발생했지만 전문성을 가진 경제산업성 국토교통성 방위성 농림수산성 등의 프로 관료들은 자기 일처럼 덤비지 않았다. 민주당 정권의 관료 배제 원칙 때문이란 분석도 있지만,관료들의 면피주의가 작용한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원전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 산하 원자력안전보안원과 도쿄전력이 초기에 사고를 축소 · 은폐하려 했던 것도 관료주의에 젖어 있었던 탓이다. 자위대가 원자로 냉각에 몸을 던지길 두려워했던 것도 그만큼 관료화됐다는 방증이다.
물론 지금 일본의 한계를 따지는 게 무의미할 수 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인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안전하게 해결토록 하는 게 최우선이다. 그러나 원전이 수습된 이후라도 일본이 이번 사태에서 표출된 한계들을 제대로 개선할 수 있느냐가 일본의 미래를 좌우할지 모른다. 그런 구조적 한계를 안고는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럼 한국은 이런 국가적 재난을 맞았을 때 일본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자연재해뿐 아니라 북한과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우리로선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한계들을 철저히 점검해 봐야 한다. 3 · 11 동일본 대지진은 우리에게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차병석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