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생수통 가는 것 하나도 안하나!" "그게 바빠서 급히 나가는 사람한테 할 소리예요?"

중소 의류업체 마케팅팀에 근무하는 박모 대리(31)와 총무팀의 정모 사원(27)이 급기야 목소리를 높였다. 물이 빈 생수통을 바꾸라는 박 대리의 지시를 정씨가 못 들은 척 한 것이다. 총무팀과 마케팅팀 간에 일주일 넘게 계속된 냉전의 산물이다.

몇 달 전 총무팀의 요구를 마케팅팀이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것이 발단이었다. 회사가 경영혁신 차원에서 도입한 부서 역량평가 보고서를 마케팅팀의 담당자가 바쁜 업무를 이유로 제때 제출하지 않은 것이다. 같은 사무실을 쓰는 총무팀장이 해당 직원에게 가서 보고서를 빨리 제출하라고 독촉하자,옆에 있던 마케팅팀장이 "다른 바쁜 일이 있으면 늦을 수도 있지,왜 이리 난리냐"며 후배들 앞에서 면박을 줬다. 물론 총무팀장보다 마케팅팀장이 고참이다. 그날 이후 두 팀장 사이에 싸늘한 찬바람이 흐르면서 다른 팀원들도 불편한 사이가 됐다.

◆"차라리 담 쌓고 지내는 게 낫지!"

경영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용어 중 '사일로 효과'가 있다. 곡식을 저장해두는 굴뚝 모양의 창고인 사일로(silo)처럼 조직의 부서들이 서로 다른 부서와 담을 쌓고 내부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상을 빗댄 말이다. 사일로는 어떻게 회사 경쟁력을 좀먹고 있을까.

회사에서 가장 흔히 부서 간 갈등에 직면하는 부서가 제품개발부다. 스마트카드 관련 기업의 영업팀에서 근무하는 장모 대리는 '전문가의 함정'에 빠져 엔지니어의 입장만 앞세우는 개발부의 고집에 질렸다. 영업 일선을 뛰며 제품에 대한 고객들의 반응을 모아 구체적인 대안까지 전달해 줘도 개발부에서는 콧방귀도 끼지 않는다. 장 대리는 "분명히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도 개발부에서는 '네가 뭘 알아'는 식으로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며 "내가 몇 년 전에 제안한 내용을 경쟁업체에서 적용하자 개발부가 부랴부랴 따라 만드는 것을 봤을 때는 정말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다"고 푸념을 늘어놨다.

재무팀도 개발팀이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다. 중견 IT기업 재무팀의 이모 과장(36)은 "재무팀 입장에서는 1만원이라도 꼼꼼히 체크해야 하지만 개발 인력들은 경비에 대한 개념도 없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반면 같은 회사 개발팀의 강모 과장(35)은 "경비가 좀 들더라도 제품 개발을 위해 필요한 돈을 쓰는 건 당연하다"고 반박했다.

시스템 설비업체 홍보팀에서 일하는 박모 과장은 다른 부서의 비협조로 공들여 준비했던 기자간담회가 차질을 빚은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난다. 회사에서 새로운 시스템 설비를 내놔 모처럼 기자들을 불렀지만,정작 담당 팀장이 거래처와의 약속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박 과장은 "거래처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신제품을 알리기에 더 좋은 기회였을 텐데 홍보는 홍보팀에서 알아서 하는 것 아니냐는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다"며 "외부에서 스카우트해 온 엘리트라 윗사람들도 제대로 뭐라고 말 못하는 것을 보면서 주인공도 오지 않는 행사를 준비한 나는 '삼류인생'이라는 자괴감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선후배 간 갈등이 부서 간 갈등으로

선후배에 따른 부서 간 알력도 만만치 않다. 무역회사 해외영업팀에서 근무하는 정 팀장(41)은 후배가 재정팀 팀장으로 오면서 두 팀원들 사이에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털어놨다. 정 팀장은 "아무리 무역회사라도 재정팀의 결재를 받아야 하는 업무가 많은데 후배가 너무 꼼꼼히 이것저것 따지다보니 마음이 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며 "원래 팀장 간에 풀어야 될 일인데도 방치하다보니 애꿎은 팀원들만 고생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소재기업의 오 팀장(38)은 다른 팀장들보다 나이가 적어 고생하는 사례다. 30대 후반으로 다른 팀장들보다 대여섯살 적다 보니 오 팀장이 이끄는 팀은 사내 온갖 허드렛일의 집결지가 된 꼴이다. 팀장회의나 부문회의에 다녀오면 결국 그는 생색은 안나면서 다들 기피하는 잡무만 잔뜩 받아오기 일쑤다.

◆동기가 아니라 '웬수'

부서 간 갈등은 동기 사이까지 갈라놓는다. 대형 유통업체 법무팀의 김모 대리(33)와 신규사업팀에 근무하는 박모 대리(32)는 입사 6년차로 절친한 동기였지만,업무 문제로 막말까지 해 가며 싸우게 됐다. 박 대리가 새로 시작하려는 업무에 김 대리가 법적 절차를 들어 딴지를 건 것이다. 팀장들의 힘을 빌려 적당히 타협하고 일을 마무리지었지만,여전히 앙금이 남아 동기모임을 할 때에도 두 사람은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

대기업 A사 기획팀에서 근무하는 강모씨(31)는 자신보다 스무살 많은 타부서 임원과 매일 불편한 자리를 갖고 있다. 제품개발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팀에 프로젝트매니저(PM)로 참여하면서부터다. 팀의 경비를 관리하는 등 돈줄을 쥐고 있지만,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개발팀 사람들과 매일 회의하다보니 서로 싫은 소리가 안 나올 수 없다. 강씨는 "개발팀 사람들이 신경을 긁어 놓을 때마다 '부서 간 유기적 협업'이라는 단어를 누가 발명했는지 원망스럽다"고 토로했다.

노경목/고경봉/유창재/조재희/강유현/강경민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