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제약사의 광고카피인 '피곤은 간 때문이야'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춘분(3월21일)을 갓 지나 낮시간이 길어지는 요즘엔 잠이 부족한 게 피곤의 주범일 가능성이 더 크다. 잦은 야근과 저녁회식,종일 TV 방송과 인터넷의 영향으로 잠을 설치는 사람이 많다. 인생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잠자는 시간은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라 뇌와 육체가 다음날 하루를 활기차게 보낼 수 있게 준비하는 기간이므로 숙면은 질병 예방과 노화 지연을 위해서도 필요한 건강요소다.

◆얼마나 자야 할까

어떤 사람은 10시간은 자야 충분하다고 느끼는 반면 4시간만 자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며 왕성한 정력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대단위 역학조사에 따르면 결론은 명확하다. 하루 7~8시간 자는 사람이 가장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수면시간과 사망률의 관계는 U자형으로 잠을 적게 자거나,반대로 많이 자면 사망률이 높아진다.

올해 '수면의학' 학술지에 발표된 내용에 따르면 1972~2006년 2만5025명을 추적 조사한 결과 남녀 모두 7~8시간을 잔 그룹이 모든 원인으로 인한 사망률과 심혈관계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이 가장 낮았다. 반면 5시간 이하와 10시간 이상 잔 그룹은 심혈관계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이 가장 높았다. 신철 고려대 안산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한국인 539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수면시간이 5시간 이하인 사람의 고혈압 유병률은 33.78%,6시간은 25.23%,7시간 21.42%,8시간 22.71%,9시간 이상이 28.35%로 나타났다는 내용을 지난해 '미국고혈압저널'에 보고했다.

수면시간이 너무 짧으면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돼 혈관이 충분히 이완되지 않은 나머지 혈압을 상승시킬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반대로 잠을 지나치게 많이 자는 사람은 수면리듬의 끊김,만성피로,면역기능 감소,수동적인 삶의 자세,우울증 등으로 사망률이 높아질 것으로 판단했다.

◆밤 11시 이전에 잠들도록 총력을 기울여야

대부분 직장인이나 학생이 오전 6~7시에 일어나야 한다고 보면 적어도 전날 밤 11~12시 전에는 잠들어야 한다. 잠이 부족하면 고혈압 당뇨병 비만을 초래할 수 있고 주간졸림증을 유발해 업무 능률이 저하된다. 더욱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관심이 많은 피부 미용을 위해서는 자정 전에 잠들어야 한다. 피부 재생에 도움이 되는 성장호르몬은 밤 10~12시에 가장 왕성하게 분비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저녁에 무리한 활동을 피해야 한다. 체온이 식어야 잠이 온다. 운동을 하면 체온이 오르고 5~6시간이 지나야 떨어지기 때문에 숙면을 위해서라면 오후 4~5시에 운동하는 게 좋다. 오후 10시를 앞두고 TV 시청이나 독서 등 교감신경계를 자극하는 행동은 삼가는 게 바람직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미지근한 물로 샤워하거나 스트레칭을 하면 근육이 이완돼 숙면에 도움이 된다.

침실에만 가면 졸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너무 춥거나 더워도 안 되고 조용하고 어두워야 한다. 카페인의 영향은 최소 8시간 지속되므로 오후 4시 이후엔 커피 등을 삼간다. 담배도 니코틴의 각성 효과가 숙면을 방해하므로 끊어야 한다. 음주는 잠자리에 든 후 4~6시간째에 알코올 농도가 현저히 떨어지면서 아세트알데히드 등 숙취물질에 의한 각성효과가 두드러져 깊은 잠을 방해하게 된다.

◆숙면의 황금비율

수면은 안구가 빠르게 마구 움직이는 렘(REM · rapid eye movement)수면과 그렇지 않은 비(非)렘(non REM)수면으로 나뉜다. 렘수면은 꿈을 꾸면서 자는 수면으로 심장박동과 호흡이 불규칙하게 나타나는 특성을 보인다. 비렘 수면은 얕은 잠인 1~2단계와 깊은 잠인 3단계로 나뉜다. 비렘수면을 끝내고 렘수면으로 바뀌는 한 사이클이 하룻밤에 3~5회 반복된다. 새벽으로 갈수록 주기가 짧아지고 깊은 잠이 줄어든다.

성인의 가장 이상적인 수면비중은 얕은 비렘수면이 50%,깊은 비렘수면이 25%,렘수면이 25%인 경우다. 신 교수는 "꿈을 꾸는 시간인 렘수면을 얕은 잠으로만 인식하는 경우가 많으나 렘수면은 낮동안의 불쾌한 기억들이나 쓰레기 같은 정보를 배설하고 필요한 정보만을 저장하는 순기능을 하며 안구운동근육과 횡경막(호흡)근육을 제외한 모든 근육을 이완시켜 심신의 휴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깊은 수면과 렘수면이 1 대 1의 비율을 이루도록 유도하는 게 짧은 시간이라도 양질의 잠을 자는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수면의학에서는 생활습관의 교정과 함께 다양한 수면제의 조합처방을 통해 숙면을 꾀하고 있다. 플루라제팜 등 벤조디아제핀 계열 수면제는 깊은 수면을 늘리고 수면상태에 들어가는 데 걸리는 입면(入眠)시간과 잠든 후 각성시간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플루옥세틴 등 선택적 세로토닌억제제(SSRI) 계열의 항우울제는 렘수면을 늘리는 효과가 있다. 벤조디아제핀에 SSRI약을 우울증 치료에 쓸 때보다 적게 넣어 복합 처방하면 무난하게 숙면이 유도될 수 있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