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고(故) 아산(峨山)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10주기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거목이 남긴 말은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이 말의 깊은 뜻을 아는 이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테다. 지금도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는 건설 · 자동차 · 조선을 세계 초일류 수준으로 키워낸 고인이다. 그것도 붉은 맨주먹에서였다. 아니 고향에서 가출할 때 들고 나온 소위 소 판 돈이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성공스토리는 고인 없이는 설명조차 어렵다. 그의 이름과 나란히 기억되는 분들은 이제 우리의 아련한 추억 속에서만 살아있다. 박정희 이병철…. 이런 분들이 아니었더라면 한국은 아직도 동북아시아 외진 곳에 있는 늙고 조그만 은둔의 나라였을 것이다.

아산의 그림자가 더욱 짙고 길게 느껴지는 것은 지금 이 땅의 기업가 정신이 갈수록 그 빛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인은 현대그룹을 창업한 세계적 기업가인 동시에 무에서 유를 일구어낸 진정한 창조인이다. 통찰과 돌파,실천은 그가 남긴 신화들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허다한 반대를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를 290일 만에 완공한 대사건(1970년)을 과연 지금의 젊은이들은 이해나 할 것인가. 불을 밝힌 야간 공사 끝에, 그리고 가난한 농부에서 건설인으로 나섰던 많은 근로자들과 함께 돌관 작업을 끝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 고속도로 위에 샴페인을 흩뿌리며 울었었다. 울산의 바닷가, 바람만이 스쳐가는 황량한 모래밭에 조선소를 세웠을 때(1973년)는 세계의 전문가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당시 정부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무려 9억3000만달러짜리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만 건설(1977년) 등은 '정주영'이라는,지금은 차라리 일반명사로 승화되었다고 할 고인의 이름 석 자와 함께 기념되는 대표적 프로젝트들이다.

이런 사업들은 무모한 도전 끝에 운이 좋아 나타난 결과들이 결코 아니다. 주베일 항만 건설 때는 울산에서 만든 철구조물을 바지선 선단으로 끌어 대양을 건넜고, 서산 천수만 간척사업 때는 폐유조선을 동원해 거센 바다 물살을 막아 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은 수십 차례의 도상 시뮬레이션을 통해 '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기에 가능했던 작업들이다. 그것은 바늘구멍의 가능성이었다. 누군가가 회장님은 어떻게 그런 기발한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을 때 고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무엇에 대해서건 진정한 해답은 그것에 대해 결사적인 고민을 한 사람이 내는 것이다"라고. 신화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지금 우리나라의 경영자와 기업인들에게 필요한 하나의 정신이 있다면 바로 정주영 정신일 것이다.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로 그리스로부터 유조선 두 척을 수주했던 열정은 그렇게 해서 나왔다. 고인은 앞서의 자서전에서 "기업이란 행동으로 이루는 것이다.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머리로 생각만 해서는 기업이 클 수 없다. 행동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아침 조간 신문이 배달되는 것을 결코 기다리지 않았다는 고인이다. 그는 신새벽에 신문 보급소를 직접 찾아가 조간 신문을 읽었다. '이 땅에 태어나서'란 그의 자서전은 고향의 부모를 회상하며 "정말 열심히 일만 하던 분들"이라고 몇 번이나 거듭 강조하고 있다. 큰 일꾼의 피는 그렇게 고인을 대한민국의 큰 일꾼으로 만들었다. 아산이 그의 부모를 회상하듯 지금 우리는 아산을 회고하고 있다.

그는 1984년 한 연설에서 "사회가 발전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이고, 자본이나 자원 기술은 그 다음"이라고 말했다. 아산은 생전에 '한강의 기적'이란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강의 기적은 우수하고 근면한 우리 국민의 저력으로 일궈낸 필연의 결과였다. 기업가 정신이 퇴조한데서 나아가 반기업 정서까지 팽배한 것이 지금 한국의 현실이다. 청년들은 오로지 공무원 되기만을 바라고 정치인들의 위세는 하늘을 찌른다. 정부 공무원들이 기업가들을 관청으로 불러 가격을 내려라, 원가 장부를 내놔라, 이익을 분배하라고 윽박지르는 그런 시대다. 정부보다 먼저 세계로 나아갔고 정부보다 먼저 러시아와 중국을 찾아나섰던 개척자다. 정주영 회장이 새삼 그리워진다. 고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