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재계 총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독을 권해 화제가 된 책이 있다. <위대한 기업을 넘어 사랑받는 기업으로>다. 대통령의 발언 사실이 알려지면서 재계에선 그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왜 이 시점에서 대통령이 이 긴 제목의 책,그것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책을 언급했을까.

◆대통령이 강조한 책

단순한 이유일 수도 있다. 국민들로부터 사랑이 아니라 지탄을 받는 기업이 적지 않으니 그룹 회장들이 신경써서 반(反)기업 정서를 넘어서는 경영 모범을 보이라는 주문일 수 있다. 그래서 대통령의 이 언급을 현 정부가 지난해부터 추진하고 있는 '공정사회'의 화두와 연결시켜 보는 시각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공정사회' 화두는 대 · 중소기업 상생,동반성장 등의 아젠다로 구체화하면서 공정거래위원회 등이 기업들의 불공정사례를 조사하는 등 실제 규제로도 이어지며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은 속앓이를 해왔다. '공정사회' 화두가 이상적이긴 하지만 그것이 기업들의 정상적인 활동을 방해하는 요인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요지다. "기업들은 시장의 압박 속에서 끊임없이 혁신하며 생존해야 하는데,협력업체 지원 여부와 원가 공개 등까지 정부가 간섭하는 것은 결국 인기영합주의"라며 노골적인 불만을 나타내는 경영자들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공정사회든 사랑받는 기업이든,그것이 모든 기업을 하향평준화시키는 반시장적 조치라는 반발이 재계의 정서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사랑받는 기업'을 강조하면서 이런 갈등을 가속화시키는 새로운 발단이 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까지 생겨나고 있다.


◆공룡 모델 vs 꿀벌 모델

그러나 이건 국내적인 문제일 뿐이다. <사랑받는 기업>의 저자들은 억울할 것이다. 특히 이 책이 사실은 공정사회 화두가 나오기 전인 2007년에 출간된 것이고,국내 번역판도 2008년에 나왔으니 말이다. '사랑받는 기업'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진짜 이유는 이 책이 '생태계(ecosystem) 경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어서다. 간단히 말하면 한 기업의 경쟁력은 그 회사만이 갖고 있는 능력이 아니라 그 회사가 속해 있는 세계,즉 생태계 전체의 조화와 응집력이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다.

기업이 관련된 생태계는 한 기업을 둘러싼 시스템 전체다. 기업을 보면 주위의 모든 것들,종업원에서부터 투자자,고객,전방 · 후방의 협력업체들,공장이 운영되고 있는 지역사회,지자체,정부 그리고 인류사회까기 기업을 둘러싼 모든 것을 아울러 생태계라고 부른다.

생태계 경쟁력이란 사실 단순한 개념이다. 비슷한 규모의 경쟁력을 갖춘 회사인데 하나는 선진국 또 하나는 후진국에서 운영되고 있다고 해보자.경영 환경이나 시장 규모,각종 인프라 활용 가능성을 볼 때 선진국에 있는 업체가 훨씬 성장 가능성이 높다. 생태계 경쟁력에서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받는 기업'이란 아젠다는 기업이 속해 있는 그 생태계 자체의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21세기 경쟁환경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됐고,그런 생태계를 만들고 주도하고 성장시켜야 하는 것이 한 기업의 책무가 됐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생태계 자체를 키우기 위해 기업은 주위의 모든 이해당사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한다. 좋은 파트너로 인정받아야 하고,좋은 거래처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기술과 제품력을 자랑해도 고립무원의 처지가 될 뿐이다.

사실 이런 생태계 경쟁력은 가만 생각하면 전혀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특히 자연의 질서를 보면 더욱 그렇다. 윤석철 서울대 명예교수의 역작 <경영학의 진리 체계>에 나오는 공룡과 꿀벌의 비유를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윤 교수는 생존모델에는 4종류가 있는데 그 가운데 공룡은 '너 죽고 나 살자'의 모델이라고 설명한다. 자연이나 다른 생물에 보탬을 주는 것 없이 끊임없이 먹어치웠기 때문에 결국 빙하기가 와서 먹을 것이 없을 때 멸종하고 말았다는 것.이에 비해 꿀벌은 '나 살고 너 살고'의 모델이다. 꽃의 화분을 도와주며 대신 꿀을 얻는 생태계의 협력체제를 유지했다는 설명이다. 생태계 자체의 경쟁력을 높이면서 자신도 지속 발전하게 되니 이런 점에서 생태계 경쟁력이란 바로 자연의 지혜였던 것이다.


◆21세기의 경쟁력 화두

생태계 경쟁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은 21세기 들어서다. 특히 최근엔 노키아 최고경영자(CEO)인 스티븐 엘롭이 전 직원들에게 직접 보낸 편지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그 중요성이 새롭게 드러나고 있다. 노키아는 휴대폰 제조 기술 면에서 세계 1등의 기업이었다. 문제는 기술 일변도였다는 데 있다. 자신들만 잘 만들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기 회사를 둘러싸고 있는 생태계에 새롭게 나타난 주인공들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다 생태계 경쟁력이 막강한 애플과 구글 등에 밀리게 됐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디바이스(기기) 싸움은 생태계 싸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생태계에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만 포함되는 게 아닙니다. 개발사 애플리케이션 광고 검색 소셜애플리케이션 위치기반서비스 통합커뮤니케이션 등 많은 것이 포함됩니다. 경쟁사들이 디바이스로 우리 시장을 잠식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전체 생태계의 힘으로 우리 시장점유율을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직접 생태계를 빨리 만들 것이냐,아니면 그 생태계 안으로 들어갈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

그렇다. 이제 고객과 종업원 정도로는 안 된다. 오로지 잘 만들어 많이 파는 싸움은 자기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먹어치운 공룡 모델에 불과하다.

'사랑받는 기업'이란 '나 살고 너 살고 모두 살고'의 모델인 것이다.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이해당사자들을 우리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관리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기업을 엄지손가락에 비유해보자.다른 손가락 하나만 다쳐도 엄지는 힘을 못 쓴다. 우리 회사를 둘러싼 전체는 바로 우리 손이요,우리 몸이요,인간 자신이 되는 것이다. 생태계 내에 수많은 주인공들과 함께 성장하지 않으면 공멸이 있을 뿐이다.

◆경쟁을 넘어 협력으로

그런데 왜 이렇게 생태계 내에 주인공이 많아졌을까.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면서 나타난 사회적 변화가 계기다. 우선 고령화가 급격하게 이뤄졌다. 미국을 보면 1989년을 기준으로 40대 이상의 중 · 장년층이 인구분포에서 주류를 차지했다. 젊은이들이 중심인 사회가 중 · 장년이 중심인 사회로 변한다는 것은 문화의 기반을 바꾸는 대변혁이다. 기능적이거나 금전적인 단견을 넘어서 의미 있는 것,영원한 것을 더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업이 단기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회 내에서 안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 특히 중 · 장년들이 모여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기업,장기적인 기업을 선호하는 운동까지 벌이는 것을 생각해 보라.이런 중 · 장년들이 생태계의 중요한 한 세력으로 떠오른 것이 21세기다.

또 다른 요인은 인터넷의 대중화다. 1990년에 상용화된 인터넷은 고객과 소비자 간의 관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전엔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개인들은 불리할 수밖에 없었고 비즈니스의 중심은 항상 기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라.불량식품이 나왔을 때 신고자 한 사람에게 보상해주면 끝나는 시절이 불과 20년 전이었다. 이제 그런 행위는 오히려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실수가 된다. 수억의 인구가 정보가 연결돼 있는 만큼 생태계 전체가 기업을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예전처럼 작은 생태계,정보가 부족한 생태계 환경에서는 기업이 생태계를 무시하고 때론 조정할 수도 있었다. 이제 기업이 생태계의 일원이 돼 그 생태계를 돌보지 않는 한 성장할 수 없는 새로운 시대에 우리는 살게 된 것이다.

'사랑받는 기업'이란 모델이 기업의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어 비즈니스 모델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아젠다로 폄하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 이 책에 나오는 장면 가운데 글로벌 기업의 CEO를 역임한 경영자가 한 파티에서 이 책 저자의 설명을 듣고는 "당신은 공산주의자구먼!"했다는 대목이 있다. 방한 강연회를 가진 저자 라젠드라 시소디어 교수는 그 경영자가 바로 잭 웰치라고 알려줬다.

기업의 이익이나 경쟁력 제고가 아니라 기업의 책임 같은 것을 얘기할 때는 그런 오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까지 나서서 강조하니 '사랑받는 기업' 모델을 국민 대다수의 인기를 얻고자 하는 '포퓰리즘적'인 정치행위로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21세기 들면서 생태계 전체의 경쟁력을 신경쓰지 않는 기업은 지속가능한 성장이 불가하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것을 반대로 보면 단순히 이익 극대화가 아니라 생태계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오히려 그것 자체로 더 큰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이 대통령의 발언으로 촉발된 사랑받는 기업에 대한 관심이 우리 기업들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즉 생태계 경쟁력을 고민하는 새로운 사고의 첫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권영설 한경아카데미 원장 yskwon@hankyung.com

▷연세대 철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워튼스쿨 MBA
▷저서=경영자를 위한 변명,심플의 시대 등
▷역서=위대한 기업을 넘어 사랑받는 기업으로,경영의 미래,피터 드러커의 리더스 윈도우,경영이란 무엇인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