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채권단(주주협의회)이 현대그룹의 우선협상대상자 자격을 박탈함에 따라 현대건설 인수 기회가 예비협상대상자인 현대자동차그룹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채권단은 현대그룹의 반발을 고려,현대건설이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 8.3%를 제3자에게 팔아 현대그룹의 경영권이 위협받지 않도록 중재키로 했다. 더 이상의 소송이나 잡음 없이 현대건설 매각을 원활하게 마무리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해석된다. 이에 따라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이 채권단의 중재안을 받아들일지 여부가 현대건설 매각의 최종 변수로 등장했다.

◆현대상선 지분은 제3자 매각 유도

채권단은 주식매매계약(본계약) 체결안은 부결되고 양해각서(MOU) 해지안은 가결됐다고 20일 발표했다. 채권단 관계자는 "현대그룹에 자금 출처를 증빙하기 위한 자료를 두 차례에 걸쳐 요구했지만 채권단이 인정할 만한 법적 구속력 있는 자료를 끝내 제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대그룹과의 협상을 끝내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행보증금 등 처리 문제를 운영위원회에 위임하고 현대차그룹의 우선협상대상자 지위 부여 여부를 추후 주주협의회에서 결정하기로 한 안건도 가결됐다. 채권단은 현대그룹이 낸 이행보증금 2755억원(입찰가의 5%)은 돌려주기로 내부 방침을 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채권단은 이날 MOU를 해지하면서 "현대그룹이 우려하는 사항에 대해서도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유재한 정책금융공사 사장은 "이는 현대건설이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 8.3%에 관한 처리 방안에 대한 것"이라며 "시장매각 또는 국민연금과 같은 제3자 인수 등 중립적인 매각 방안을 앞으로 현대그룹과 논의하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현대차와 이달 중 협상 시작

채권단은 현대그룹과의 협상이 중단됨에 따라 현대차그룹에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부여하는 방안을 이르면 이달 중 주주협의회에 상정할 것으로 보인다.

채권단이 마련한 중재안을 현대차그룹이 받아들이면 현대건설이 현대차그룹으로 넘어가더라도 현대그룹의 경영권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 사실상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해 온 현대상선에 대한 현대그룹의 지분(우호지분 포함 40.76%)과 현대중공업과 KCC 등의 지분(범 현대가 33.85%)이 현행대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현대그룹은 현대건설의 현대상선 지분 8.3%를 현대차그룹이 가져갈 경우 그룹 전체의 경영권이 위협받게 된다고 우려해 왔다. 채권단으로선 이런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중재안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현대차그룹이 이 같은 방안을 받아들일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현대차그룹이 당초 시장 예상을 뛰어넘는 5조1000억원의 가격을 써낸 것도 현대상선 지분 인수를 통한 현대그룹 경영권 확보 가능성이 반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유 사장은 이와 관련, "현대그룹과의 협상이 종료되면 현대차그룹과 협의를 곧 시작할 것"이라며 "아직 공식적인 논의는 하지 않았지만 현대차그룹 측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소송전 가능성 배제 못해

현대그룹은 현대건설 인수자금 5조5100억원 중 1조2000억원을 프랑스 나티시스은행에서 담보나 보증 없이 빌렸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대출을 받은 현대상선 프랑스 법인 자산이 33억원에 불과해 논란이 일었다. 채권단은 자금 출처 의혹이 커지자 현대그룹에 대출계약서나 텀시트(term sheet · 세부계약 조건을 담은 문서)를 내라고 요구했지만 현대그룹은 이를 거부하고 두 차례에 걸쳐 대출확인서만 제출했다.

현대그룹은 채권단의 대출계약서 제출 요구와 일방적인 협상 종료 등에 대한 전방위 민 · 형사 소송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그룹은 채권단에 대한 소송을 통해 우선협상대상자 보호의무 위반,대출계약서 제출 요구에 대한 부당성,일방적인 협상 종료 조치의 불법성 등에 대한 책임을 따질 것으로 보인다.

현대그룹은 이날 현대상선 프랑스법인의 2조원 규모 유상증자를 통해 현대건설 인수대금을 지급하는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며 현대건설 인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만일 채권단의 중재안에도 불구하고 현대그룹이 소송을 제기할 경우 현대건설 매각은 상당기간 지체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채권단은 보고 있다.

이호기/이태훈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