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옵션 상품인 키코(KIKO)사건 피해기업들이 은행과 벌인 91건의 1심 소송에서 사실상 전패했다. 소송에 참여한 118개 기업 가운데 19개 기업만이 은행의 설명의무 미비를 입증해 약간의 배상을 받아냈을 뿐이다.

서울중앙지법의 키코 전담 4개 재판부는 29일 법원에 계류 중인 총 141건의 소송 중 91건에 대한 판결에서 중소기업들의 청구를 대부분 기각했다. 50건은 이날 선고하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1부(부장판사 여훈구)와 민사22부(부장판사 박경호),민사31부(부장판사 황적화),민사32부(부장판사 서창원)는 "키코 계약이 구조적으로 불공정하거나 환헤지에 부적합한 상품이 아니다"며 키코 계약을 유효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고객 보호의무 위반을 이유로 한 손해배상책임은 중소기업이 키코계약을 체결할 당시의 정황에 비춰 사건별로 구체적으로 판단했다.

즉 키코와 같은 통화옵션 상품을 과도한 규모로 활용하면 시장환율에 따라 막대한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설명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은행의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이를 근거로 법원은 이번 소송에 참여한 118개 기업 중 19개 기업에 대해서는 은행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책임을 인정한 사례를 살펴보면, A기업은 매출이 30억원에 불과하고 15만달러의 평균 수출실적을 올리는 가운데 자금난에 빠져 은행을 찾았다. 은행은 환헤지 거래 경험이 없는 A사에 대출과 연계해 40만달러 규모의 키코계약을 제안하면서 위험을 설명하지 않았다.

또 B기업의 주거래 은행인 C은행은 B기업의 재무상태를 잘 알고 있으면서 과도한 규모의 키코계약을 권유,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과정에서 은행은 설명은커녕 서류조차 사후에 작성하기도 했다. D은행도 E기업이 다른 은행과 키코계약을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중복으로 계약을 맺었다. 환율이 상승하면 해당 헤지규모에 따라 고스란히 손해를 보게 되는 도박과도 같은 거래를 권유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극단적인 사례를 제외한 대다수 기업들의 손해배상청구는 기각됐다.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 측은 "키코로 인한 금융사기의 실체를 밝히고 분명한 책임을 묻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밝혔다. 공대위 관계자는 "개별 기업들의 의견을 수렴해 항소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키코 가입 기업들은 은행을 상대로 2008년부터 무더기로 소송을 냈으며 은행은 "상황이 변했다고 계약을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맞서 왔다.

지난 2월 초 선고된 수산중공업과 씨티은행간 키코 소송 첫 판결에서 법원은 "옵션 계약으로 은행이 얻는 이익이 다른 금융거래에서 얻는 것에 비해 과다하지 않다"며 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무더기 1심 선고사건과 별건으로 일부 키코사건은 이미 고등법원에서 항소심 절차가 진행 중이다. 2심 결과는 내년 초 나올 예정이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