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기는 어딜 갑니까. 여기가 생활터전인데,지켜야죠."

연평도 남부리에서 숙박업과 식당을 하는 김재현씨(73)는 24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어린 시절 서울에서 6 · 25전쟁도 겪었는데 북한이 포탄을 쐈다고 무작정 (뭍으로) 나갈 수는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북한의 포격으로 폐허가 된 연평도 주민들이 전날에 이어 24일에도 잇따라 인천 등 육지로 탈출했지만 1200여명의 주민(소연평도 제외) 가운데 450여명은 여전히 섬을 지키며 이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서울에서 태어난 김씨는 50년 넘게 육지에서 생활하다 10여년 전 연평도에 들어와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전날 밤을 대피소 바깥에서 꼬박 새운 그는 이날 오전 6시50분 연평도를 출발해 인천으로 향한 해양경찰청 순시선에 아내를 태워 보냈다. 김씨는 "생계수단인 숙박업과 식당을 포기한 채 무조건 나갈 수 없다"며 "아내까지 고생할 필요가 없어 당분간 자녀들과 함께 지내라고 설득해 아침에 내보냈다"고 말했다.

연평도 주민들이 전날 밤 북한군의 추가 포격에 대비해 목숨을 의탁한 대피소는 시설이 워낙 낡아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30여년 전에 설치된 이후 한 번도 개보수가 이뤄지지 않다보니 그동안 늘어난 주민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주민들은 대부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냉기가 올라오는 찬 바닥에 몸을 기댄 채 밤을 새워야 했다. 조형규씨(74)는 "밤새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난방도 되지 않아 얼어 죽을 뻔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정형성씨는 "10평(33㎡) 남짓한 곳에 50여명이 몰려 남자들은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밤새 바깥에서 서성거렸다"며 "부녀자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겨우 눈을 붙였다"고 말했다.

문한서씨는 "또 포탄이 날아들까봐 무서워 한숨도 잘 수 없었다"며 "폭격 당시 다른 곳에서 일하다가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서로의 생사도 모른 채 대피소에 머물렀다"고 전했다.

인천=김일규/임도원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