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죽어라 야근했더니 수당은 찔끔…"택시비는 줘야지"
김 과장은 오늘도 야근이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밥먹듯이 하는 일이다. 오후 10시가 넘었는데도 팀원 대부분은 자리를 지킨다. 회사 빌딩 전체의 불이 꺼진 건 오후 9시.'야근자도 이제 퇴근하라'는 회사의 신호였다. 하지만 아니다. 불이 꺼지자 막내가 냉큼 일어나 불을 켠다. 그러면 모두들 일에 몰두한다.

정확히는 몰두하는 척한다.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야근이다보니 김 과장은 낮에 일을 건성건성 처리한다. "낮에 할 일을 밤에도 하려면 일을 배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게 김 과장의 경험이다. 밤 10시30분.팀장이 갑자기 시계를 본다. "어,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집에 갑시다"라고 외친다. 이제야 '야근 끝'이다.

◆야근 좌우하는 제1요인은 '상사'

공기업에 다니는 박모 부장(51)은 사내에서 '농업적 근면성'으로 유명하다. 그의 출근 시간은 오전 8시.퇴근시간은 오후 10시가 넘는다. 일이 쌓이면 밤 12시 넘어까지도 일하는 스타일이다. 툭하면 휴일에도 출근한다. 아래 직원들이 보면 가족도 없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박 부장과 함께 일하는 직원들은 죽을 맛이다. 부장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박 부장이 야근을 강요하는 건 아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일없는 사람은 정시 퇴근하는 것이 회사를 위하는 일"이다. 야근비를 아낄 수 있어서란다. 정시 퇴근하라는 것은 그의 진심이다. 툭하면 "나는 아이들도 다 컸고 조용한 저녁시간에 일하기를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얘기한다.

아무리 그래도 야근하는 부장을 남겨놓은 채 매일같이 정시 퇴근하려면 뒷목이 근질근질하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충성 야근'을 하는 게 도리다. 박 부장과 함께 일하는 이모 대리(33)는 "부장이 저녁 먹으러 가자고 하면 야근거리가 없어도 이를 피할 방안이 마땅치 않아 동반야근을 하곤 한다"며 "일을 좋아하는 상사를 만나지 않는 것도 직장생활의 행운"이라고 말했다.

◆야근을 위해 낮에는 잔다?

'야근형 상사'에 적응하기 위한 직장인들의 처세술도 가지가지다. 중견기업에 입사한 윤모씨(28)는 매일 밤 늦게까지 이어지는 야근에 군소리 없이 따랐다. 심지어 아침에는 정식 출근시간인 오전 8시반보다 훨씬 이른 7시에 출근했다. 회사 선배들에게는 "차기 임원감"이라며 칭찬을 받았지만 그에겐 비밀이 있었다.

윤씨는 "낮 업무시간이나 점심시간에 틈틈이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 들어가 '쪽잠'을 자고,여유가 더 있을 때는 사우나도 하고 온다"며 "몇몇 동기들이 알아챈 것 같지만 성실하다는 이미지를 굳히기 위해 이 전략을 계속 구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야근비,많아도 걱정 적어도 걱정

대기업 보험사 마케팅팀에 근무하는 장모 대리(29)는 지난달 야근수당을 보고 착잡해졌다. 월급의 3분의 2에 달하는 금액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장 대리는 "내년 경영계획을 수립하느라 한 달 내내 새벽별 보기 운동을 했으니 돈으로라도 보상을 받는 게 맞긴 한데,이렇게 사는 게 인간이 할 짓인가 싶어 자괴감이 든다"고 했다.

그러나 장 대리가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다며 눈치를 주는 김 과장,이 대리들도 많다. 중소기업 L사에 근무하는 한 대리(31)는 매일 야근을 하지만 보상은 국물도 없다. 매일 밤 11시가 넘어 퇴근해도 손에 쥐는 것은 택시비도 안 되는 1만원 뿐이다. 경영이 어렵다며 회사가 시간당 5000원씩 지급되던 야근 수당을 폐지해서다. 근로기준법 같은 것은 남의 나라 얘기일 뿐이다.

◆겉으론 야근 금지,속으론…

중견기업인 H사는 지난해부터 야근 상한제를 도입했다. 직원들이 지나치게 혹사당한다는 판단 아래 월 기준으로 52시간 이상의 초과 근무를 금지시킨 것.만약 직원들이 52시간 이상을 초과해 야근 근무를 하면 해당 팀장에게 경고 메시지가 발송된다. 회사 측은 경고 메시지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승진에 불이익을 주겠다는 방침까지 세웠다. 박모 팀장(45)은 "팀원들이 52시간 근무시간을 넘었다는 메일을 받으면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다"며 "혹시 나에게 무슨 불만이 있어 일부러 야근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고 털어놨다.

반면 제도를 악용하는 파렴치한 상사도 있다. 같은 회사 기획팀에서 근무하는 홍모 과장(35)은 어느날 팀장으로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들었다. 당분간 가급적 야근 수당 신청을 하지 말라는 것.이 회사는 사내 인트라넷으로 자신의 야근 시간을 입력하면 팀장 결재 아래 자동으로 계좌에 야근 수당이 입금된다. 팀장은 팀원들이 야근을 너무 많이 하면 자신의 승진에 지장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야근은 하되 수당은 신청하지 말라고 못박았다.

◆농업적 근면성? 비효율?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야근을 많이 한다고 일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상사들의 생각은 다르다. K그룹 인사팀에 근무하는 권모 차장(40)은 "일반적으로 야근을 많이 하는 부하직원들이 일도 잘한다"고 단언한다. "그만큼 회사와 일에 애정이 있다는 증거"라는 게 권 차장의 설명이다. 실제 그의 부서에서 올 상반기 A등급을 받은 팀원 2명은 야근을 가장 많이 하는 직원들이었다. 이들의 야근 시간은 주당 평균 20시간을 넘었다. 반면 하위 D 등급을 받은 직원들의 평균 야근 시간은 주당 1~2시간에 불과했다.

◆휴일근무는 괴로워

휴일근무도 직장인들을 괴롭히는 건 마찬가지다. 직장은 수원에 있지만 집은 서울인 문 대리(31)는 주말에 출근하려면 왕복 세 시간은 족히 걸린다. 회사 통근 차량도 없고 고속도로는 꽉 막혀서다. 문 대리는 "집에서 회사까지 왕복 시간이 오히려 근무 시간보다 많은 경우도 있다"며 "회사 옆에 사는 팀장은 자기 생각만 하고 휴일에도 수시로 불러 내는 데 정말 짜증난다"고 했다.

드물지만 휴일근무를 자청하는 경우도 있다. 분당에 사는 김 대리(32)는 매주 토요일 오전 서울 직장으로 출근한 뒤 오후엔 여자친구를 만난다. 그는 "상사들도 좋아하고 휴일근무 수당을 받는데다 여자친구도 만나니 일석삼조"라며 웃었다.

이상은/이관우/이고운/강유현/강경민 기자 selee@hankyung.com

◆이 기사는 독자 bada_015님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알림='김과장&이대리'는 직장 생활에서 일어나는 각종 애환과 에피소드를 싣는 지면입니다. 보다 알차고 생생한 내용을 담기 위해 독자 여러분의 의견을 구합니다. '김과장&이대리'에서 다뤘으면 하는 주제와 에피소드,직장생활 성공노하우 등을 작성해 이메일(kimnlee@hankyung.com)로 보내 주시면 지면에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