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묻지 않은 자연의 울림이 화폭에서 소근거린다. 붓이 지나간 자리에는 진노란 산야와 꽃대가 있고 활짝 핀 진달래도 보인다.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떠는 나뭇가지와 가을 들꽃들이 손밑에서 자라난 것처럼 생생하다. 화선지 위의 감칠맛나는 붓질은 예나 지금이나 문인화의 묘미를 그대로 보여준다.

문인화를 현대적 점묘화법 형태로 계승하고 있는 한국화가 임농 하철경 화백(59 · 호남대 교수)의 개인전이 서울 인사동 라메르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하 화백은 남농 허건의 손녀 사위로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19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자연의 오마주'.'천은사의 꽃비''대흥사''송광사'를 비롯해 설악산 도봉산 북한산 풍광,제주 용두암 등 우리 산천을 특유의 필법으로 그린 40여점이 걸렸다. 문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그가 2년간 전국의 명산을 찾아 작업한 신작들이다.

야산이나 바닷가 풍경,사찰 등을 주로 그려온 그는 먹의 진한 선만으로 그리는 백묘화법,크고 작은 점을 혼용하는 '미점법'을 활용해 개성 있는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는 빼곡한 선과 색이 화폭 위에 출렁거린다. 고향의 가을색이 싱싱하게 튀는 게 마치 음색과 같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대상에서 받은 인상과 감흥을 기록한 음색의 하모니'라고 평한다. 화폭에 긴장과 파격,충만과 공허를 리드미컬하게 담아냈다는 얘기다.

형상과 비형상,구상과 추상 사이를 넘나들며 슬쩍 기교를 부리는 흔적도 보인다. 그의 '꽃바람 송광사'는 형태를 약간 뭉그러뜨리며 빼곡한 선과 색으로 산사의 가을 풍경을 표현한 작품.고향의 가을이 화폭 위로 출렁거리며 다가온다.

프랑스의 미술평론가 마틸드 클라레는 "하 화백의 작품에는 삶의 방향과 자연의 밀도,고요,억제된 힘,정확한 필묘,극도의 세묘 등이 호흡하고 있어 감동을 준다"고 말했다. (02)3210-0071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