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목동에 사는 고현진씨(37)는 전업주부다. 그런데도 오전 6시면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14년 몸에 밴 습관이다. 벌떡 일어나 아이들 학교에 보낼 준비하고 출근준비를 하기 위해 바삐 움직인다. 그러다가 '아,나는 전업주부지'하면서 주저 앉곤 한다.

고씨가 전업주부가 된 것은 이제 열흘 남짓.지난달 말 14년 정든 직장에 사표를 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취직해 과장자리까지 오른 직장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워킹맘(working mom · 일하는 엄마)'을 포기한 것은 다름아닌 육아 때문.두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과 2학년이 되자 직장생활과 육아사이에서 갈등을 겪어야 했다. 결국은 직장을 포기하기로 했다. 고씨는 직장을 그만두면서 후배 워킹맘들에게 "워킹맘은 직장동료,가족,사회적 시선 등 만인과의 전쟁을 벌이는 신분"이라는 인사말을 남겼다. 직장에서 살아남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다.

◆사내 보육시설은 그림의 떡

워킹맘의 최대 고민은 '누가 대신 아이를 맡아줄 것인가'다. 직장 내 보육시설은 여전히 열악하다. 마음에 드는 베이비시터(아이를 봐주는 사람)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들다.

국내 한 공기업에 다니는 오모 대리(32).그는 최근 정부가 보육시설을 설치하지 않는 기업의 명단을 공개한다는 내용을 담은 저출산 대책을 발표한 것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과거의 씁쓸한 기억이 떠올라서다. 몇 년 전 회사에서는 사내에 보육시설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출산을 계획하고 있는 오 대리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그런데 사내 남자 직원들의 반응이 떨떠름했다. 회사에 보육시설이 생기면 남자 직원들이 아이를 데리고 출퇴근해야 하는 상황이 닥칠까봐 걱정됐던 것이다. 결국 노동조합에서는 "사내 여론 조사를 통해 보육시설과 헬스장 중 직원들이 더 원하는 것을 지어달라"고 회사 측에 제안했고,회사 측은 이를 받아들였다. 결론은 물론 헬스장이었다. 오 대리는 "맞벌이를 해도 육아에 대한 책임은 결국 여자들이 떠 안아야 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라고 말했다.

◆출산하면 부부 금슬도 깨지고…

대기업에 근무하는 한모 과장(37)은 귀여운 딸을 얻은 후 부부 사이에 금이 갔다. 출산일이 예정보다 늦어 아내는 충분히 쉬지 못하고 회사에 바로 복귀해야 했다. 당연히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출근해서도 딸이 눈에 밟힌다는 아내는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몇 번이나 물어왔다.

한 과장은 눈앞이 캄캄했다. 몇 년 전 아파트를 분양받으면서 빌린 은행 대출금이 아직도 엄청났다. 한 과장은 조심스럽게 "지금 당신이 회사 그만두면 대출금은 어떻게 갚느냐"며 사직을 만류했다. 이런 대화가 몇 차례 오간 후 아내는 폭발했다. "다른 집 남편들은 외벌이도 잘하던데 당신은 뭐냐"며 따지고 들었다. 한 과장도 지지 않았다. "다른 집 부인들은 아이도 잘 키우고 시댁에도 잘하고 회사도 잘 다니더라"며 격하게 다퉜다.

은행에 근무하는 정모 과장(34)은 정반대의 이유로 남편과 다툼을 벌였다. 정 과장은 지난 4월 출산을 하면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합쳐서 총 4개월의 휴가를 냈다. 출근 날이 가까워오자 남편은 "차라리 회사를 그만두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시골에 계시는 시어머니까지 "뭐니뭐니해도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며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정 과장은 "혼자 벌어서는 도저히 생활이 안된다"며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한직으로 발령내놓고 배려했다는데

'애 딸린 엄마'라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몰지각한 직장 상사들도 워킹맘에겐 '제1의 적(敵)'이다. 워킹맘 나모 대리(30)는 결혼한 후에도,아이를 낳은 후에도 자신은 열혈 커리어우먼일 줄 알았다. 결혼 후에도 나 대리는 회사의 거한 술자리에 빠진 적이 없었다. 연휴에 시댁에는 못 가도 회사에는 나와 잔업을 해치우는 욕심많은 여성이었다. 외모 가꾸는 데도 늘 열심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출산하고 나니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출산 후에도 살은 빠지지 않아 날렵한 몸매는 온데 간데 없었다. 모유수유를 하느라 맥주 한방울 입에 댈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나 대리의 뚜껑이 확 열릴 일이 발생했다. 개념없는 부장이 나 대리에게 "거 애 낳더니 몸매가 영 아니야"라고 툭 던지는 것 아닌가. 부장의 몰상식함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나 대리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오면 "아이랑 영상통화라도 하나? 아이들은 그냥 놔둬도 잘 큰다니까"라며 놀려댔다.

이 정도면 약과였다. 얼마 전 인사에서 그는 한직으로 밀려났다. 인사고과에서 선두를 달리던 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애딸린 엄마'라는 이유밖에 없었다. 회사의 설명은 달랐다. "둘째아이를 가졌으니 야근이나 잔업이 없는 부서로 배려해줬다"는 것.나 대리는 인정할 수 없었다. 과장 승진이 내년이었다. 승진에서 물먹지 않으려면 종전 부서에서 악착같이 일해 인정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한직으로 발령 받은 것 자체가 나 대리에겐 '인사상 불이익'이었다.

"둘째 아이를 가져도 얼마든지 야근을 할 수 있다"며 문제를 제기하는 그에게 부장은 "회사의 배려를 거부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가장 무서운 적은 남편?

내년 차장 승진을 앞두고 있는 대기업의 김모 과장(39).남들보다 빨리 승진대상에 올랐지만 그는 관심이 없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직장생활을 끝낼 생각이기 때문이다. 회사 안팎에서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으로 인정받았던 그다. '직장생활하는 데는 가정도,아이도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신조를 갖고 있던 그도 결국은 육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 아이와 가정을 아랑곳하지 않는 남편의 이기심도 한 요인이 됐다.

처음 임신을 했을 때도 김 과장은 안한 척했다. 야근도 했다. 배가 불룩 나와도 장거리 출장을 마다하지 않았다. 야간대학원을 다니며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그러고도 남들보다 30분 일찍 출근했다. 스스로 '가정일은 개인 문제일 뿐 회사로부터 배려받을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고 다짐하며 악착같이 매달렸다.

문제는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불거졌다. 형편없는 성적과 자꾸만 삐뚤어지는 성격이 불씨가 됐다. 남편이 어느날 "당신 좋아서 직장다니고 공부한 거 말고 아이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느냐"며 짜증을 냈다. 억장이 무너졌다. '집은 누구돈으로 샀고,아이 학원비는 누가 냈는지,시댁 용돈은 어디서 나왔는지….' 눈물을 머금고 결단을 내렸다. 직장생활의 억척스러움을 아이에게 쏟기로 말이다.

김동윤/이관우/이정호/이고운 기자 oasis9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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