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이야기꾼' 故 이윤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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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의없는 말로 후배 보살펴
웃음과 목소리, 위트 못 잊어
웃음과 목소리, 위트 못 잊어
"우리 둘 다 같은 과(科)네요?"
10년도 한참 지난 어느 소설가의 결혼 피로연 자리에서였다. 이윤기 선생이 맞은편에 앉아 국수를 먹고 있던 후배 소설가에게 한마디 했다. 가뜩이나 선생 앞이라 조심,조심이던 후배가 영문을 몰라 눈만 동그랗게 떴다.
차차 알게 되었지만 선생의 어법은 좀 남다르다. 1,2,3 순서대로가 아닌 1 다음에 불쑥 3이 나오는 식이다. 그러니 청중은 사라진 2의 내용을 듣기 위해 자연스럽게 선생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날도 그랬다. 이유도 없이 불쑥 같은 과라고 했으니 후배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다음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이쑤시개가 필요없지요. 그냥 물 한번 들이켜고 씁,하면 끝이잖아요?" 잠시 뒤에야 상황을 파악한 후배 소설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피로연 내내 어깨에 들어가 있던 긴장도 내려놓았다. 언제 후배의 벌어진 잇새까지 다 들여다보았을까 신기하기도 했지만 격의 없는 말 한마디를 골라 불편했을 후배의 마음까지 살피는 선생의 마음 씀씀이에 감탄하던 날이었다. 생각해보니 선생이 있던 자리에서는 늘 그랬다.
선생은 후배들의 이름 뒤에 꼭 씨(氏)자를 붙여주었다. 누구 씨,누구 씨. 사무적일 수도 있는 그 말이 그렇게 세련되고 따뜻하게 들린 적이 없었다. 선생의 타계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도 선생의 그 목소리였다. "하성란씨?" 그 목소리가 너무도 선연해 뒤돌아볼 뻔했다.
선생은 처음 만난 이 앞에서도 전에 한번 만난 적 있었던 것처럼 소소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놓는다. 가끔 자신의 성공담 등으로 목소리가 커질만한데도 선생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나직나직하다. 그러다 바지 주머니에서 잘 접힌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는다. "이 손수건요. 소매로 쓱쓱 입이나 코를 훔치는 게 아니라 손수건을 써야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바로 제 아냅니다. " 손수건 한 장에도 사연이 있고 이야기로 풀어내는 이가 바로 선생이었다. 선생은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선생은 잘 알려진 대로 신화연구가이면서 번역자 그리고 소설가였다. "아, 숨은그림찾기?"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작품으로 선생을 기억하는 이들이 다섯이라면 '그리스인 조르바'의 번역자인 선생을 아는 이들은 열에 열이다. 그만큼 선생은 오랫동안 소설보다는 번역에 정열을 기울였다. 그러다 돌연 1990년대 중반 소설가로 돌아와 많은 소설들을 발표했다. 소설은 결코 황성옛터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선생의 작업 방식 또한 선생의 화법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이 작고한 날에는 비가 내렸다. 선생을 마지막으로 본 건 이청준 선생의 장례식장에서였다. 흰 와이셔츠를 입은 선생은 볕에 그을려 거무스레했다. 수많은 담금질의 흔적인 양 조금 마른 듯한 선생은 강건해보였다. 그때 선생은 따님과 함께 또 다른 번역 작업을 시작한 뒤였다. 어릴 적 읽은 '플루타크 영웅전'이 일본인 번역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중에 꼭 내 손으로 번역하겠다는 어릴 적 그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오랜만에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숫기가 없어 먼 발치에서 목례만 하고 뒤돌아섰다. 선생과는 앞으로 많은 날들이 있을 거라 철석같이 믿었다.
선생의 돌연한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 선생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선생의 웃음소리와 잔잔한 목소리,겸양과 그 위트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무래도 나는 이 모든 것이 선생의 독특한 화법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기에 이 정적이 다음 말을 잇기 전의 잠깐 동안의 뜸들임처럼 느껴진다. 여전히 나는 귀기울인다. 선생이 다음 말씀을 꺼내놓을 때까지.
하성란 < 소설가 >
10년도 한참 지난 어느 소설가의 결혼 피로연 자리에서였다. 이윤기 선생이 맞은편에 앉아 국수를 먹고 있던 후배 소설가에게 한마디 했다. 가뜩이나 선생 앞이라 조심,조심이던 후배가 영문을 몰라 눈만 동그랗게 떴다.
차차 알게 되었지만 선생의 어법은 좀 남다르다. 1,2,3 순서대로가 아닌 1 다음에 불쑥 3이 나오는 식이다. 그러니 청중은 사라진 2의 내용을 듣기 위해 자연스럽게 선생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날도 그랬다. 이유도 없이 불쑥 같은 과라고 했으니 후배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다음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이쑤시개가 필요없지요. 그냥 물 한번 들이켜고 씁,하면 끝이잖아요?" 잠시 뒤에야 상황을 파악한 후배 소설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피로연 내내 어깨에 들어가 있던 긴장도 내려놓았다. 언제 후배의 벌어진 잇새까지 다 들여다보았을까 신기하기도 했지만 격의 없는 말 한마디를 골라 불편했을 후배의 마음까지 살피는 선생의 마음 씀씀이에 감탄하던 날이었다. 생각해보니 선생이 있던 자리에서는 늘 그랬다.
선생은 후배들의 이름 뒤에 꼭 씨(氏)자를 붙여주었다. 누구 씨,누구 씨. 사무적일 수도 있는 그 말이 그렇게 세련되고 따뜻하게 들린 적이 없었다. 선생의 타계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도 선생의 그 목소리였다. "하성란씨?" 그 목소리가 너무도 선연해 뒤돌아볼 뻔했다.
선생은 처음 만난 이 앞에서도 전에 한번 만난 적 있었던 것처럼 소소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놓는다. 가끔 자신의 성공담 등으로 목소리가 커질만한데도 선생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나직나직하다. 그러다 바지 주머니에서 잘 접힌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는다. "이 손수건요. 소매로 쓱쓱 입이나 코를 훔치는 게 아니라 손수건을 써야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바로 제 아냅니다. " 손수건 한 장에도 사연이 있고 이야기로 풀어내는 이가 바로 선생이었다. 선생은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선생은 잘 알려진 대로 신화연구가이면서 번역자 그리고 소설가였다. "아, 숨은그림찾기?"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작품으로 선생을 기억하는 이들이 다섯이라면 '그리스인 조르바'의 번역자인 선생을 아는 이들은 열에 열이다. 그만큼 선생은 오랫동안 소설보다는 번역에 정열을 기울였다. 그러다 돌연 1990년대 중반 소설가로 돌아와 많은 소설들을 발표했다. 소설은 결코 황성옛터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선생의 작업 방식 또한 선생의 화법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이 작고한 날에는 비가 내렸다. 선생을 마지막으로 본 건 이청준 선생의 장례식장에서였다. 흰 와이셔츠를 입은 선생은 볕에 그을려 거무스레했다. 수많은 담금질의 흔적인 양 조금 마른 듯한 선생은 강건해보였다. 그때 선생은 따님과 함께 또 다른 번역 작업을 시작한 뒤였다. 어릴 적 읽은 '플루타크 영웅전'이 일본인 번역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중에 꼭 내 손으로 번역하겠다는 어릴 적 그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오랜만에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숫기가 없어 먼 발치에서 목례만 하고 뒤돌아섰다. 선생과는 앞으로 많은 날들이 있을 거라 철석같이 믿었다.
선생의 돌연한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 선생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선생의 웃음소리와 잔잔한 목소리,겸양과 그 위트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무래도 나는 이 모든 것이 선생의 독특한 화법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기에 이 정적이 다음 말을 잇기 전의 잠깐 동안의 뜸들임처럼 느껴진다. 여전히 나는 귀기울인다. 선생이 다음 말씀을 꺼내놓을 때까지.
하성란 <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