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 때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인호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 사무실(서울 역삼동)에 들어서면 정면 벽에 커다랗게 붓글씨가 쓰여진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시장으로의 귀환.' 30여년간 경제 관료를 지낸 김 이사장의 경제관을 집약한 문구다.

김 이사장은 1997년 청와대 경제수석을 끝으로 관료생활을 접었다. 그후 민간에서 연구 활동을 하면서 활발한 언론 기고를 통해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특히 2002년부터는 월 1회씩 한국경제신문 '다산칼럼'을 집필하면서 시장경제 전도사를 자임했다.


그는 '다산칼럼'을 통해 경제 이슈를 시장경제라는 관점에서 명쾌하게 분석하고 해법을 제시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시장경제라는 길 외에 한국 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는 게 그의 소신이자 철학이다. 김 이사장은 60여회에 걸쳐 쓴 '다산칼럼' 등을 모아 '길을 두고,왜 길 아닌 데로 가나'라는 제목의 칼럼집을 펴내고 9월1일 오후 6시30분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출간기념회를 갖는다. 김 이사장을 지난 27일 서울 역삼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칼럼집을 출간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다산칼럼 기고를 시작하던 2002년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를 이긴 해였습니다. 당시 많은 이들이 시장경제에 대해 정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기고를 통해 경제 현안 해결에 시장경제 원리를 적용할 것을 끊임없이 주장해왔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글도 많지만 지금 이 순간 같은 주제로 다시 쓴다해도 비슷한 내용으로 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한국 경제가 시장경제 관점에서 보면 구조적으로 크게 변화된 게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늦게나마 책으로 출간하자고 생각한 것도 이런 연유 때문입니다. "

▼시장경제 관점에서 우리 경제가 구조적으로 변화된 게 없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한국 경제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빠른 속도로 회복 중입니다. 이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지금의 경제구조로 이런 성장을 계속할 수 있느냐를 보면 상당히 걱정됩니다. 당장 불균형 문제만 봐도 그렇습니다. 지난 수십년간 수출 중심의 정책으로 경제는 성장해왔지만 그 결과 내수와는 상당한 불균형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시장경제 원리를 무시하고 정부가 지나치게 개입한 부작용으로 봐야 합니다. "

▼현 정부도 불균형과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해법이 뭐라고 보십니까.

"양극화의 본질도 시장경제 원리로 접근하면 해법이 간단합니다. 경제적 성과를 기여한 정도에 따라 배분하는 것이 시장경제 원리입니다. 정부가 인위적이고 사후적으로 분배에 개입한다면 왜곡이 일어나고 비능률이 발생합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격차를 줄이기 위해 대기업들한테 더 거둬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많은 왜곡이 빚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

▼대기업 · 중소기업 상생 문제는 어떻게 풀어가야 합니까.

"정부가 시장원리를 무시하고 섣불리 개입하면 결과는 전혀 예상과 다르게 나타납니다. 선한 의도에서 출발한 정책이라도 시장과 괴리되면 자원배분의 왜곡을 초래하고 결과적으로 보호하려는 대상을 오히려 피해자로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 · 중소기업 양극화는 과거 수년간 수출 촉진을 통한 경기의 인위적인 부양책과 고(高)환율 정책에 따른 수출과 내수 산업 간 자원배분의 왜곡에서 발생한 측면이 큽니다.

양극화를 해소하려고 중소기업을 지원 대상으로 접근할 경우 또 다른 왜곡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예컨대 역대 정부마다 중소기업을 위해 수많은 재정 및 조세지원 사업을 쏟아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로,인력,자금,기술,대기업과의 협력 등 중소기업이 당면한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결국 문제 해법은 정부의 인위적인 개입으로 왜곡된 자원배분 구조를 시장 원리에 맞도록 정상화시키는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

▼일각에선 고환율 정책 덕분에 우리 경제가 금융위기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결과론적인 얘기라고 봅니다. 환율을 통해 경쟁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성립이 안되는 논리입니다. 우리 돈을 평가절하해서 경쟁력을 유지한다는 것인데 난센스예요. 가공의 경쟁력에 불과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당장은 수출증대 효과가 나타나겠지만 결과적으로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화폐가치가 평가절하돼 가만히 앉아서 국민소득이 저하되는 꼴을 당하게 됩니다. 또 내수 부진으로 수출 중심의 대기업과 내수 중심의 중소기업 간 격차는 갈수록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수출 대기업도 환율에 의지해서는 경쟁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조조정해야 할 기업들도 환율에 의존해 연명하는 부작용이 나타날 우려가 있습니다. "

▼'친서민-중도실용'은 정부의 하반기 경제정책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 큰 줄기입니다. 일부에선 포퓰리즘 지적도 있습니다.

"친서민은 한마디로 정치의 논리라고 봅니다. 경제에서 정의될 수 없는 개념을 갖고 정책을 펴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본래 서민이라는 것이 경제학적 개념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책은 분명한 타깃층이 있어야 하는데,서민이란 개념은 포괄적이고 모호해 타깃층이 분명치 않은 정책을 양산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

▼위기 이후 성장잠재력을 확충하는 것이 국가 당면 과제입니다. 성장잠재력 확충을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입니까.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그러려면 정부부터 눈에 보이는 경제적 성과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시장경제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데 인위적으로 성과를 도출해내려면 왜곡이 발생합니다. 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으면 성과는 저절로 잘 나오게 돼 있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기본적으로 세계 각국의 경제운영방식이 물 흐르듯 시장원리에 맞게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

▼정부는 경제정책을 어떤 방향으로 펴야 합니까.

"정부의 경제정책은 매년 거시경제 수치 목표를 우선 정해놓고 이를 달성하겠다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이런 패턴을 버릴 때가 됐습니다. 고(高)성장 신화도 버려야 합니다. 성장률의 높고 낮음 자체를 우리 경제의 본질적 문제로 보는 시각은 한국 경제의 불치병 중 하나입니다. 앞으로는 경제정책의 포커스를 경쟁과 소비자중심,국제화 등 세가지에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정부의 역할은 경쟁을 제약하는 것을 풀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소위 비경제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국제화 정책도 중요합니다. 자동차 반도체 철강 화학 등 글로벌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산업은 모두 국제화에 앞선 분야입니다. 반면 교육이나 정치 등 경쟁력없는 분야는 하나같이 국제화가 안된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부는 지금보다 훨씬 더 과감한 국제화 정책을 펴 경쟁력없는 분야를 치열한 경쟁 환경에 노출시켜야 합니다. 다시 말해 경쟁력은 결국 경쟁적인 구조에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 역할은 경쟁 구조를 만들어주는 것이고 나머지는 시장에 맡기는 게 정답입니다. "

정종태 기자 jtchung@hankyung.com

김인호 이사장은

경제관료 시절 금융실명제 등 경제 개혁의 큰 획을 그었던 정책들을 주도한 정통 관료 출신이다. 경제기획원 차관보 시절 조순 당시 경제 부총리를 도와 금융실명제와 토지공개념 도입을 주도했다. 대외경제조정실장 재직 때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과 남북경협 등 굵직한 난제를 처리했다. 관료 시절 그는 원칙 앞에서는 타협하지 않는 소신파로 평가받았다.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을 때 정부 규제완화 정책의 미비점을 냉정하게 비판해 주목을 받았고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11월 청와대 경제수석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퇴임 후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원장,와이즈인포넷 회장,중소기업연구원 원장을 지냈고 2008년 독립재단으로 발전한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에 취임했다.

▲1942년생,경남 밀양 ▲경기고 · 서울대 법대,미국 시라큐스대 행정학석사 ▲1966년 행정고시 4회 ▲1989년 경제기획원 차관보 ▲1992년 환경처 차관 ▲1994년 철도청장 ▲1996년 공정거래위원장(장관급) ▲1997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1999년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원장 ▲2000년 와이즈인포넷 회장 ▲2004년 중소기업연구원 원장 ▲2008년 시장경제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