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공명(異路功名 · 다른 길에서 공명을 이룸)의 사주를 타고난 저자가 독문학을 접고 풍수학 교수로 전공을 바꾼 것은 우연이 아니다. '풍수'가 본래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열망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는 '신들린 듯이' 책을 썼다. 《조선풍수,일본을 論하다》는 그 중 하나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국가 권력과 부를 적절하게 분배하기 위해 풍수를 수용했다.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를,세종이 '풍수 테크노크라트'인 이양달을 중용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말기부터 국운과 함께 쇠퇴해 살아 있는 사람의 집터를 보는 양기 풍수는 사라지고 묘지를 고르는 음택 풍수만 남았다.

그런데 저자가 '실패한' 조선의 풍수지리 잣대를 일본 왕릉과 정원에 들이댄 이유는 뭘까. 풍수지리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래된 것은 7세기 무렵.그후 오랜 기간을 거쳐 일본화에 성공했다. 11세기 헤이안 시대의 유명한 조경고전인 《작정기》를 보면 일본풍수는 산보다 물을 중요시했다. 우리는 사신(四神)을 사산(四山)으로 여기지만 일본에서는 주산(主山) 이외의 나머지 삼신(三神)은 연못(주작),흐르는 물(청룡),큰 길(백호)로 삼았다.

정원은 일본 풍수가 가장 잘 나타난 예인데 임금과 신하,백성의 3자 관계를 구현했다. 왕릉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조선의 왕릉과 비슷한 모습을 취했다가 점차 배산임수가 아닌 배수임산(背水臨山)의 형태를 띤다. '산은 인심을 나누지만 물은 인심을 합친다'는 걸 알고 난 뒤 일본은 도읍지를 에도(江戶 · 도쿄)로 옮겼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장풍국(藏風局) 지세에서 큰 물로 감싸인 득수국(得水局) 형세로 탈바꿈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유럽과 교류해 문명을 꽃피웠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조선은 19세기 말까지 쇄국정책을 고수하다가 결국 20세기 들어 병탄의 비극을 맞게 된다. 일본 풍수지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교훈과 함께 "풍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갈린다"는 저자의 주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장석 기자 sak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