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용 부품을 만드는 2차 협력업체 A사는 좀처럼 현금을 구경하기 어렵다. 거래 관계에 있는 1차 협력업체들의 결제 방식이 3개월짜리 어음이기 때문이다. 자금 사정이 어려웠을 때 현금 결제를 부탁했다가 "거래선을 바꾸겠다"는 말까지 들었다는 게 A사 측 설명이다.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사정이 더 어려워진다. 원자재 값 상승분이 부품값에 제때 반영되지 않다 보니 손해를 보면서 부품을 공급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고 했다. 조금 사정이 나아졌다 싶으면 어김없이 부품값 인하 요구가 내려온다.
A사 관계자는 "하도급법의 적용을 받는 대기업들은 1차 협력업체에 현금으로 부품 대금을 결제하고 원자재값 인상분도 제때 반영하지만 2,3차 도급관계로 내려오면 이 규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말단 하도급 질서 잡힐까

공정거래위원회가 하도급법의 적용 범위를 2,3차 협력업체로 확대하는 일본식 모델의 도입을 추진키로 한 것은 A사와 같은 사례를 줄이기 위해서다. 공정위는 대기업들의 권고와 노력만으로 2,3차 이하 협력업체들의 거래 관행을 바꾸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제도 개선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현행 하도급법은 원사업자가 하도급업체보다 매출과 직원 수가 두 배 이상 큰 경우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중소기업청이 최근 실시한 하도급 관계 실태조사를 보면 대기업의 현금성 결제(어음 발행 주체가 지급을 보장해 곧바로 시중은행에서 현금화할 수 있는 어음 대체 결제 포함) 비중은 94.8%로 중소기업의 88.3%보다 높다. 어음 결제 비중은 하도급 단계가 아래도 내려갈수록 높아진다. 1차 협력업체의 어음 결제 비중은 11.0%지만 3차 협력업체로 내려가면 이 비율이 17.5%까지 늘어난다.

원자재 값 때문에 빚어지는 갈등도 하도급 단계가 내려갈수록 심한 것으로 조사됐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올해 초 208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원도급업체가 원자재 가격을 부품 대금에 반영해 주고 있는지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원자재 값은 평균 19% 올랐으나 납품 단가 인상은 1.7%에 그쳤다.

지난 2월 공정위가 실시한 같은 내용의 조사에서 원자재 가격을 납품가격에 반영하고 있다는 응답이 70%에 달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조사 결과에 차이가 나는 것은 모집단 성격이 상이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공정위는 대기업 1차 협력사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지만 중기중앙회의 설문 모집단은 50인 이하 기업이 74%나 포함돼 있었다.

◆부실 중소기업 구조조정 효과도 기대

국내 중소기업은 숫자는 많지만 경쟁력은 해외 경쟁국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50명 미만의 소기업 비중이 높다 보니 '규모의 경제' 효과를 누리지 못한다.

2007년 기준으로 한국의 인구 1만명당 소기업 수(각국 통계청 자료)는 9.7개로 5.8개인 일본,2.8개인 미국보다 많다. 중소기업 직원 1인당 부가가치(한국은행 집계)는 5500만원으로 1억5800만원인 대기업의 3분의 1 수준이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업은 시장에서 퇴출되는 것이 시장경제의 원칙이지만 한국 중소기업은 예외였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1998년부터 최근까지 연평균 매출 증가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중소기업이 14.2%에 달하는 것이 그 증거다. 외환위기 이전(1992~1997년) 9.9%에 비해 매출 감소 중기 비중이 4.3%포인트 늘었다.

업계에서는 하도급법 적용 범위를 확대하면 경쟁력이 떨어지는 중소기업 중 상당수가 시장에서 퇴출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우량한 2,3차 업체 입장에서는 법 개정이 경영에 호재다. 하도급 관계에서 60일 이상의 어음이 사라지는 만큼 자금 운용에 숨통이 트일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