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다시 보기] (14) 런던 가로등에 발목 잡힌 英 전기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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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영국 따라잡기
19세기 GDP 선두 英, 기술·인프라 대체 늦어
신산업 경쟁력 약화…美·獨·日에 추월 허용
19세기 GDP 선두 英, 기술·인프라 대체 늦어
신산업 경쟁력 약화…美·獨·日에 추월 허용
1870년 유럽과 북미지역을 통틀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영국이 가장 높았다. 풍부한 자연자원을 가
지고 있으면서 인구가 적었던 호주를 제외하면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였다. 가장 먼저 산업화
를 이룩한 나라이니 이는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미국,네덜란드,벨기에 등의 1인당 GDP가 그나마 영국에 근접했을 뿐 유럽의 중심 국가들인 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은 영국의 50%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막 산업화에 시동을 걸었던 일본은 영국의 20%정도였다.
그로부터 130년이 흐른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2008년 미국
의 1인당 GDP는 영국의 130%이며,독일과 프랑스의 GDP는 각각 93%와 99%다. 또 일본의 1인당 GDP는
영국의 96%다. 그나마 이 수치는 영국이 비교적 선전한 최근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독일,프랑스,일본 등
에 영국이 뒤처진 때도 있었다.
한국의 1인당 GDP는 영국의 77% 수준으로 높아졌다. 영국의 1인당 GDP는 후발 산업국가들에 추월당하거나 따라잡혔으며 심지어는 180년이나 늦게 출발한 한국의 맹렬한 추격을 받는 위치에 놓이게 됐다.
사실 따라잡히는 것은 영국뿐만이 아니다. 20세기 최강자가 된 미국의 1973년 1인당 GDP는 1만6689달
러(1990년 기준 미국달러)였다. 이때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용'들은 3631달러로 미국의 22% 수준이었
다. 그러나 2008년 한국의 1인당 GDP는 미국의 60% 수준이 됐고 홍콩과 싱가포르는 미국과 비슷한 수준
으로 발전했다. 이같이 후발 국가들의 소득수준이 선발 국가를 따라잡는 것을 '소득수준 수렴현상'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뭘까.
우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것보다 이미 있는 기술을 가져다 쓰는 편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선발국가가 자본 투입량을 늘리면 수확체감의 법칙이 작용하므로 후발국에 비해 추가투입 자본의 생산성이 낮다는 것도 이 현상을 설명할 때 동원되는 논리다. 여기에 하나 덧붙인다면, 영국이 후발 산업국에 밀린 것에는 '경로의존성'이 작용한 면도 있다는 것이다.
시계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바늘이 오른쪽 방향으로 회전하도록 만들어진 것은 발명가의 선택이었고 그건 아마도 우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이후에 만들어진 모든 시계 바늘의 회전방향은 오른쪽으로 굳어지게 됐다. 한때 ‘거꾸로 가는 시계’가 나와 반짝 인기를 끈 적이 있지만 결국은 사라졌다. 사람들이 적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같이 한번 경로가 정해지면 그 관성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바꾸기 어려워지는 현상을 경로의존성이라 한다.
제2차 산업혁명의 핵심 산업은 강철과 자동차,전기 등이었다. 그런데 영국은 경로의존성 때문에 이들 산업에서 미국,독일 등과 경쟁하는데 불리했다. 영국은 19세기초의 생산품목,기술,규모에 맞는 설비와 공장을 이미 갖추고 있어 새로운 산업에 투자하는 일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강철과 자동차 생산은 넓은 공장부지와 대규모 생산설비를 필요로 했지만 영국의 산업단지에는 이들이 들어설 공간이 없었다.
또 하나의 예는 가로등이다. 영국의 도로에는 일찍이 가로등이 설치됐는데 그 에너지원이 가스였다. 19
세기 후반 전기가 실용화되기 시작하고 전등이 발명되자 후발 국가들은 전기 가로등을 사용하기 시작했
다. 그러나 영국은 이미 설치된 가스 가로등을 전기 가로등으로 전환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전기 산업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 경제는 아직 경로의존성의 영향을 덜 받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와우아파트로 상징되는 개발독재 시대의 한국 아파트는 부실 덩어리였다. 그러나 이 아파트들은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모두 사라졌다. 이는 ‘빨리빨리’ 문화가 경로의존성을 약화시킨 독특한 경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허구생 <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