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상품권 납품업체 H사는 '이상한' 제안을 받았다. "S건설이 비자금으로 공사발주처 및 행정관청에 선물할 상품권을 구입하려는데 거래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S건설의 대리인을 자처한 사람은 S건설 공사계약팀 대리로 근무하던 Y씨와 판촉물 도소매업자 B씨였다. Y씨는 주로 S건설 접견실이나 사옥 앞 커피숍에서 H사 관계자를 만나 B씨가 위조한 S건설 명의 상품발주서와 인수증을 전달하고 상품권을 받았다. Y씨는 사무실에서 법인인감증명서와 사용인감신고서 원본을 빼돌려 거래관계 확인을 요구하는 H사에 교부할 수 있도록 했다. 이들은 상품권을 할인하는 수법으로 자금을 융통,계좌입금이나 수표로 대금결제했다. 2007년 12월 Y씨는 "삼성비자금 사건으로 더 이상 상품권을 납품받지 않기로 했다"고 H사에 통보하며 손을 뗐다.

하지만 B씨는 2008년 2월 무렵 다시 H사에 접근,앞으로는 자신을 통해 S건설의 모 상무와 직접 거래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에 H사는 상품권을 계속 납품했는데, 이 과정에서 B씨에게 대금 30억원을 받지 못했다. H사가 2008년 5월까지 납품한 상품권은 32만6700장(시가 308억7315만원 상당)이었다. 이후 Y씨는 서울중앙지법에서 사기에 대해 유죄판결을 선고받았다.

그러자 H사는 S건설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H사는 "Y씨가 S건설을 대리해 거래했다고 믿을 만한 정황이 있었고 불법 행위에 가담했으므로 Y씨의 사용자인 S건설은 미수금 중 3억원을 손해배상하라"고 주장했다.

대법원 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는 S건설에 일부 책임이 있다고 본 원심을 깨고 사건을 최근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S건설 측에 거래사실의 진위를 확인하지 않은 점 △비자금 거래인데도 추적 가능한 수표가 대금 지급 수단이라는 부분을 의심하지 않은 점 △교부받은 사용인감신고서의 하자를 파악하지 못한 점 등을 들며 H사가 주의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H사가 주의했더라면 Y씨의 행위가 직무권한과 관계없는 불법임을 알 수 있었다"면서 "원심은 사용자 책임이 면책되는 '피해자의 중대한 과실'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다"고 밝혔다. 대법원의 판결은 피해자가 제대로 주의하지 않았다면(중대한 과실) 소속 직원의 불법 행위로 손해를 봤다 해도 사용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취지다.

원심은 H사가 Y씨의 소속 및 Y씨 등의 설명을 믿을 만한 이유가 있었고 비자금 거래라고 알고 있는 상황에서 S건설의 임원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보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1심에서는 원고 패소 판결이 나왔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