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매협의를 진행하기 위해 최근 서울 현대 · 기아자동차 본사를 찾은 독일인 M씨는 흔치 않은 광경을 목격했다. 빨간색 머리띠를 두른 10여명이 정문 옆에 커다란 플래카드를 걸어놓은 채 대로변에 앉아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던 것.M씨는 경비가 강화된 정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50~60m를 우회해 농협 하나로마트를 통해 들어가야 했다. 그는 "나중에 물어보니 협력업체 해고자들이 집회를 열었다고 하더라"며 "글로벌 기업 본사 앞에서 이 같은 일이 별다른 제재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전했다.

사옥 앞에서 장기 집회를 벌여온 사람들은 기아차의 경차 '모닝'을 위탁 생산하고 있는 동희오토의 협력업체 해고자들이다.

지난 12일 시작된 해고자들의 밤샘 시위가 열흘 가까이 계속되면서 현대 · 기아차뿐만 아니라 현대제철 현대로템 등 수천명의 입주사 직원들이 정문 대신 하나로마트 출입구를 통해 출 · 퇴근하고 있으며,시위 과정에서의 소음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해외에서 본사를 찾은 딜러와 바이어,해외 협력업체 직원들도 불편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동희오토 해고자들의 요구 사항은 즉각적인 복직과 함께 근본적인 저임금 구조를 뜯어고치라는 것이다. 해고자들은 "하도급업체들은 기아차와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급여가 절반도 안 된다"며 "계약기간이 2년만 넘으면 해고에 몰리는 고용 불안을 현대 · 기아차가 해결해 달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충남 서산 동희오토 정문 및 서산시청 등에서 천막 농성을 벌여왔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원도급업체인 기아차 본사 앞으로 몰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기아차 측은 "해고자들은 충남지역 노동운동을 세력화하기 위해 학력과 경력을 속이고 동희오토 협력업체에 위장 취업한 사실이 밝혀져 2008년부터 작년까지 법적으로 정당한 절차를 거쳐 해고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서울고등법원과 충남지방노동위원회,중앙노동위원회 등은 해고자 중 이모씨 등 7명에 대한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결정)을 내린 상태다.

기아차 관계자는 "이들을 고용한 주체는 동희오토 협력업체이며,기아차는 원도급업체가 아닌 만큼 협상할 권한도 의무도 없다"며 "금속노조 등 기존 노동운동 세력이 개입한 정황이 있는 등 시위의 진정성도 의심된다"고 강조했다.

현대 · 기아차는 금속노조 기아차 지부가 최근 타임오프(근로시간 면제)제 시행을 놓고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인 데 이어 이번 해고자 농성으로 그룹의 대내외 이미지가 실추되는 것은 물론 직원들의 사기까지 떨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