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잊지못할 그 순간] "설비도입 실패 딛고 1962년 주석도금강판 국산화"
음료수,통조림,페인트관 등에 사용되는 금속용기인 석도강판은 알루미늄,유리 등 많은 대체 재료가 있음에도 오늘날까지 다양한 용도로 널리 쓰이고 있다. 내식성,용접성,도장성,인쇄성,보관성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특성상 인체에 무해한 '주석'으로 표면을 처리해 '주석도금 강판'으로 불린다. 6 · 25 전쟁 이후 군수,민간용으로 석도강판 수요가 증가 추세에 있었지만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내에서는 생산 기술이 없어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농기계 매매 사업에서 번 돈으로 1959년 말 쇠를 깎는 연마석 생산공장을 인수하면서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일에 자신감이 붙을 때인 그즈음 새로운 사업을 만나게 됐다. 9900㎡ 부지의 공장에 미국 국제개발국(AID) 자금 10만달러를 따내 석도강판 도금라인을 만들려는 사람이 있는데 사정이 어려워 사업 인수자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선진국의 석도강판 이용 역사는 50~100년이 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불모지나 다름없었으며 수요도 늘고 있어 미래가치가 높다고 판단했다.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4가 93.현재 동양타워가 들어선 자리에 있던 주정공장을 구입한 것이 지금의 TCC동양(옛 동양석판)의 시초가 됐다. 나는 이 공장을 석도강판 제조공장으로 개조했다. 당시 낡은 건물을 수리하는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개척자적 투혼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자본,기술,경험 등 그 어느 하나 만족할 만한 것이 없는 황무지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막 탄생된 회사의 앞 날은 평탄치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금속공업을 전공한 모 대학교수의 조언을 받아 미국 제품인 절판전기식 석도금기 한 대를 도입했다. 1960년 5월부터 약 3개월간의 설치공사 끝에 8월 시험가동에 들어간 뒤 깜짝 놀랐다. 본래 목적했던 석도강판 생산용 설비가 아니라 소형 성형물을 석도금하는 기계라는 사실이 판명됐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미개척지였던 석도강판 기계설비에 대해 충분한 지식이나 정보를 갖춘 전문가가 전혀 없었던 영향이 컸다.

설비 투자 실패로 인한 자금난은 창립된 지 얼마 안 된 회사를 위기에 빠트렸다. 하지만 이 정도의 시행착오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러고 있다간 아무 일도 못 한다. 우선 공장부터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심했다. 과거의 손실에 대해서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다각도의 연구와 검토 끝에 2차 설비 도입을 추진,1962년 2월 일본에서 열지식 석도금기 한 대를 발주했다.

1차 설비 도입의 실패에서 무엇보다도 선진국의 석도 제조설비에 대한 견학과 연구를 통해 이 방면의 전문지식을 반드시 익혀야 한다는 교훈을 배웠다. 일본 한 종합상사의 주선으로 공장을 닫은 채 2년간 일본을 드나들며 기술을 습득하고 열지식 석도금 설비와 전기 석도금 설비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1962년 5월 드디어 설비 준공식을 갖고 제품 생산을 시작했다. 1925년 석도강판을 생산한 일본보다 무려 37년이나 늦었지만 국산화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금속공업사에 큰 획을 그을 만한 위대한 사건이었다. 3년간 포기를 모르고 치밀한 사전 연구와 면밀한 계획을 세운 데 따른 보상이기도 했다.

이를 발판으로 회사는 현재 미국,일본,유럽,남미,중동 등 세계 30여개 국가에 완제품을 팔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직접 설계한 주석도금 플랜트 설비를 1992년 태국,1996년 미국,1997년 중국에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30여년 만에 신일본제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세계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하게 된 것은 석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그야말로 불굴의 도전정신과 집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쾌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