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여행] 거제 해금강 지나…사람 마음 닮은 지심도까지…자유로운 영혼도 '풍경의 포로'가 된다
신거제대교를 건너면 거제 땅이다. 고려 의종,우암 송시열 등이 유배되었던 옛날의 거제는 생각만으로도 두려운 격절의 땅이었다. 오죽하면 이규보(1168~1241)가 "이른바 거제현이란 데는 남방의 극변으로 물 가운데 집이 있고,사면에는 넘실거리는 바닷물이 둘러 있으며,독한 안개가 찌는 듯이 무덥고 태풍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여름에는 벌보다 큰 모기떼가 모여들어 사람을 문다고 하니,참으로 두렵다"라고 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의 거제는 사시사철 남해안의 비경을 찾아오는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곳이다.


[감성 여행] 거제 해금강 지나…사람 마음 닮은 지심도까지…자유로운 영혼도 '풍경의 포로'가 된다
◆전쟁의 상흔과 수려한 풍경


먼저 고현동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 공원을 찾아간다. 중공군 · 인민군을 합쳐 17만 전쟁포로가 수용돼 있던 거제 포로수용소는 반공과 친공포로들이 서로 살육상잔하던 끔찍한 사건들이 빈번했던 곳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원래 포로수용소가 있던 자리는 아파트,학교 등이 들어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수용소의 살벌했던 분위기는 6 · 25 때 인민군으로 참전해 거제 등지에서 3년간 포로생활을 했던 강용준(1931~)의 장편소설 《멀고 긴 날의 시작》과 역시 거제포로수용소에서 포로 생활을 했던 김수영 시인(1921~68)의 산문 《나는 이렇게 석방되었다》에 잘 묘사돼 있다. 당시의 상황이 리얼하게 재현된 유적관을 둘러보고 나니 김수영의 시구처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알겠다. 이데올로기의 감옥이야말로 의심할 바 없는 인간의 지옥이다.

다음 행선지는 남부면 갈곶리 해금강마을이다. 해금강의 원래 이름은 갈도(葛島 · 칡도)였다. 몇 년 전 유람선을 타고 해금강을 돌아본 적이 있다. 해식동굴인 십자동굴과 일월봉 · 병풍바위 · 촛대바위 · 은진미륵바위 등 기암괴석들이 이곳이 왜 남해의 금강산이라 일컫는지 말해 주었다.

횟집들이 빼곡한 골목을 지나 해금강호텔 아래 갯바위로 내려갔다. 유성의 꼬리처럼 긴 해무가 휘감고 있는 해금강은 신령스러운 기운이 느껴진다. 한 사나흘 저 섬에 처박혀 있다 오면 세속의 때가 말끔히 씻겨질까.

걸어서 도장포 마을에 닿는다. 테마박물관 옆길을 따라 신선대로 내려간다. 갓처럼 생긴 큰 바위 아래로는 자줏빛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다. 이 바위에 제를 올리면 벼슬을 얻는다는 전설이 있다. 옅은 해무가 강강술래라도 하듯 신선대를 감돌고 있다. 신선은 세속의 단조로움에 싫증난 인간이 발명한 아바타다. 그렇다면 해무는? 아바타에 입히는 신비의 옷이겠지.

마을 북쪽 끝 산기슭에는 초원지대인 '바람의 언덕'이 있고,언덕 꼭대기엔 커다란 풍차(?)가 있다. 전기로 돌리면서 풍차라고 부르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하여간 바다를 전망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건너편 학동몽돌해수욕장과 외도까지 손에 잡힐 듯하다. 그런 점에서 '바람의 언덕'보다는 망너메라 부르던 옛 이름이 한결 어울리는 곳이다.

◆가슴을 적시는 푸른 해조음


학동몽돌해수욕장 가는 길은 해안도로 7㎞.'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힌 곳이다. 얼마 가지 않아 천연기념물 제233호 동백숲이 빠끔히 얼굴을 내민다. 숲을 따라 걸으면서도 이따금 바람의 언덕에 시선을 준다. 오늘은 날씨가 심하게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잔뜩 흐렸다가 반짝 햇볕이 나고,한 치 앞도 안 보일 만큼 짙게 낀 해무가 흔적 없이 사라지기를 되풀이한다. 어쩌면 바람의 언덕은 진정한 무위(無爲)가 무엇인가를 설(說)하는 한 권의 경전인지 모른다.

어느덧 학동해수욕장으로 들어섰다. 10년 전 이곳 학동마을에서 하룻밤 묵은 적이 있다. 그 밤 '내 귀는 소라 껍질,바다의 소리를 그리워한다'는 장 콕도의 시처럼 내 귀는 소라껍질이었다. 신새벽 몽돌밭으로 밀려드는 해조음에 잠이 깨 홀로 바닷가를 걸었다. 파도소리가 적막한 내 영혼 속을 시나브로 파고들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위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소리를 증발시키는 한낮,그저 진공의 가슴으로 바닷가를 걷는다. 여기저기 온통 뿌리를 드러낸 곰솔 노거수들이 서 있다. 밑바닥까지 송두리째 드러낸 채 막장의 생을 사는 곰솔의 한 생이 동글동글한 몽돌들의 한 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아아,내 생애는 곰솔의 생에 더 닮아 있었구나. 나는 곰솔 뿌리에 연민을 한 자락 이불처럼 덮어 주었다.

◆수평선
[감성 여행] 거제 해금강 지나…사람 마음 닮은 지심도까지…자유로운 영혼도 '풍경의 포로'가 된다
의 삶을 지향하다


장승포행 버스를 탔다. 학동을 떠난 버스는 구조라해수욕장과 와현해수욕장을 스쳐간다. 난 학동보다 고운 모래와 물이 맑은 와현해수욕장에 더 끌린다. 장승포항에서 '동백섬' 지심도행 배를 탄다. 지심도까지는 3마일,금세 섬에 닿았다. 생김새가 마음 심자를 닮았다는 지심도(只心島).그러나 난 지자를 '다만 지(只)'자 아닌 '길이 지(咫)'자로 읽고 싶었다. 참 마음이 지척에 있는 섬.지심도를 걷다 보면 어디에선가 잃어버린 내 본색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하선한다.

빼곡한 동백나무들은 조금이라도 햇볕을 더 받으려고 종족끼리 박터지는 생존경쟁을 벌이는 중이다. 돌아오는 뱃전 위에 갈매기들이 오락가락 날아다닌다.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는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의 한 구절을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결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처럼 살지 않겠다. 동백나무의 생보다는 털머위 · 천남성의 생을 살고 싶다. 수평선,그 높낮이 없는 상태야말로 인간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하늘이 아닐는지.



안병기 여행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