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은 바다가 땅덩어리 깊숙이 파고들어 온 곳이다. 사천만의 끝에서 육지에 상륙하면 경남의 중심지랄 수 있는 진주로 곧장 쳐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사천은 왜적의 침입이 빈번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는 곳이다.

정유재란 때 정기룡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명나라 원군이 연합하여 왜적을 물리쳤던 사천읍성을 찾았다. 그러나 시민의 산책처가 된 읍성의 옛 성곽은 역사의 추억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쉬운 상념을 안고 길가에 늘어선 벚나무들의 열병식을 받으며 용현면 선진리로 철 지난 회치를 간다.

◆거북선으로 왜선 13척 격침시킨 현장

서부경남 사람들은 봄이면 "선진으로 회치 간다"고 한다. '회치'는 서부 경남 사투리로 경치 좋은 곳에 가서 한판 잘 노는 것을 뜻한다. 봄에 선진리로 '회치' 가는 것은 선진리 왜성 안 수백 그루 벚나무가 일제히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리는 장관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선진리 왜성 들목에는 '당병무덤' '댕강무데기'라고 부르는 사각형 무덤인 조명군총이 있다. 정유재란 때 선진리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을 물리치려다 희생된 조 · 명 연합군의 무덤이다. 조 · 명 연합군에 승리한 왜군은 죽은 군사들의 귀와 코를 베어 본국으로 보내고,목은 베어서 이렇게 큰 무덤에 묻은 것이다.

선진리 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고려의 토성 위에 급히 돌을 쌓아올린 성이다. 현재 이 성의 주인은 군락을 이룬 벚나무들이다.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선 충령비,그 아래 쪽에 선 '이충무공사천해전승첩기념비'가 애써 '적과의 동침'을 견뎌내고 있다.

나무데크를 따라 횟집단지가 밀집해 있는 선진항으로 내려가 사천만을 바라보았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 사천해전에서 처음 거북선을 출전시켜 왜선 13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바닷물이 서해처럼 몹시 흐리다. 역사란 집단 기억의 한 형태이다. 사천해전의 기억만은 맑고 푸르게 민족의 뇌리에 각인되기를….

◆매향암각과 박재삼문학관

백석 시인이 '삼천포-남행시초 4'라는 시에서 "아 모도들 따사로히 가난하"다고 했던 삼천포에 닿았다. 남일대 해수욕장을 둘러본 후 매향암각을 찾아 나섰다. 매향암각은 향촌동 진널산 기슭에 있었다.

"정유 2월 15일과 무술 2월 15일에 수륙제와 무차대회를 베풀었다. 이때 침향 · 포락취향 · 목침향을 태웠다. 그런 후에 비구와 시방 시주들이 전부 가까이 하였다(丁酉二月十五日 戊戌二月十五 日當陳水陸无遮大會 至此沈香浦洛聚香木沈香 然後馮諸比丘十方施主具近于後)"라는 글귀와 30명 가량의 시주자 명단이 적혀 있다. 승려와 민간이 공동으로 매향의식을 치른 후 그 내용을 바위에 아로새긴 것이다.

매향(埋香)은 미륵보살을 공양하고 도솔천의 미륵정토에 왕생하고자 향을 땅에 묻는 종교의식이다. 왜구의 잦은 침몰로 말미암은 심리적 불안감을 달래는 한편 새 세상에 대한 염원을 담은 제의이기도 했다.

노산공원 박재삼문학관에 도착했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박재삼(1933~1997) 시인은 네 살 때 삼천포로 이사와 이곳에서 성장했다. 삼천포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 진학을 못한 채 삼천포여중 사환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시조시인 김상옥을 만난 시를 쓰기로 결심하고 고려대 국문과에 진학했으나 중퇴한다. 1955년 《현대문학》에 '섭리' 등의 시 추천으로 문단에 나온 이래 《천년의 바람》 등 15권의 시집을 낸 박재삼은 가난과 설움에서 우러나온 정서를 전통적 가락에 얹어 아름답게 표현했다.

'국민학교를 나온 형이/ 화월(花月)여관 심부름꾼으로 있을 때/ 그 층층계 밑에/ 옹송그리고 얼마를 떨고 있으면/ 손님들이 먹다가 남은 음식을 싸서/ 나를 향해 남몰래 던져 주었다. / 집에 가면 엄마와 아빠/ 그리고 두 누이동생이/ 부황에 떠서 그래도 웃으면서/ 반가이 맞이했다. / 나는 맛있는 것을/ 많이 많이 먹었다며/ 빤한 거짓말을 꾸미고/ 문득 뒷간에라도 가는 척/ 뜰에 나서면/ 바다 위에는 달이 떳는데/ 내 눈물과 함께/ 안개가 어려 있었다. '(시 '추억에서 30')

시인이 겪었던 가난이 가슴을 울컥하게 한다. 지난 시대,가난은 우리 겨레의 천형이었다. 문학관을 나와 노산공원 남단에 세워진 정자로 갔다. 아름다운 한려수도와 삼천포항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시인도 어렸을 적 이따금 이곳에 올라 가난의 설움을 저 너른 바다에 씻어냈으리라.

◆활기찬 삼천포수산시장

삼천포수산시장 들목에 들어서자 비릿한 생선 냄새가 먼저 마중나온다. 시장은 낙지 · 문어 · 개불 · 개조개 · 소라 · 바지락 · 갑오징어 등 해산물과 멸치 · 디포리 · 쥐치포 등 건어물을 사러온 사람들로 크게 북적인다. 건어물 가게 아주머니에게 "화어(花魚) 만드는 분을 소개해달라"고 청을 넣었다. 이 지방 특산품인 화어는 꼬리에 노란색과 빨간색 물을 들인 게 특색이다. 새우 · 학꽁치 · 달강어 · 붉은메기 등을 머리와 뼈를 제거한 후 꼬리가 붙은 상태로 조미하여 건조한 어포다.

화어를 가공한다는 분과 어렵사리 연락이 닿았으나 지금은 화어를 만들지 않는다면서 만남을 한사코 거절한다. 우리는 지금 전통의 황혼 속에 살고 있다. 쥐치어를 말린 쥐치포를 빼놓고 삼천포를 말할 수 없다. 성어가 25cm가량인 쥐치어는 몸이 펀펀하고 푸른빛 바탕에 회갈색 얼룩이 점점이 박혔으며 등지느러미 앞쪽에 2cm 정도 날카로운 가시가 솟아 있다.

생선축에 끼지도 못하던 쥐치어가 술 안주로 각광을 받으면서 대량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말이었다. 한때는 쥐치포가 삼천포 경제를 쥐락펴락하던 시기도 있었다. 쥐치어 말리는 풍경이 보고 싶었지만 냉풍건조가 대세인 요즘엔 보기 힘든 풍경이라고 한다.

창선 · 삼천포대교 부근의 대방진 굴항(掘港)에 들른다. 굴항이란 바다 쪽에선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에 인공으로 만든 선착장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다 거북선을 숨겨 두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실안 앞바다에 이르러 오브제처럼 설치된 죽방렴들을 바라본다. 죽방렴은 참나무로 된 발목을 갯벌에 박아 발처럼 엮어 만든 그물을 조류가 흘러오는 방향을 향해 V자형으로 벌려 고기를 잡는 전통 어로 방법이다.

죽방렴에서 잡은 멸치는 맛과 품질이 뛰어나 값을 높게 친다. 대교공원에는 삼천포 내 고향으로 돌아올 것을 간곡히 호소하는 애향심 투철한 '삼천포 아가씨' 노래비가 서 있다. 사람의 마음은 자신이 사는 곳의 산천을 닮는다던가. 부산배에 탄 내 님에게 내 품이 아닌 삼천포로 돌아와달라고 에둘러 말하는 삼천포 아가씨.그의 마음은 리아스식 해안을 닮은 듯 은근한 곡선이다. 기다림의 어업인 죽방렴과 삼천포 아가씨의 기다림이 조우하는 실안 앞바다는 기다림의 미학이 꽃 피는 곳이다.

등대와 신수도 · 늑도 등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몽환적 풍경은 나그네마저 한 마리 회귀성 어종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일까. '언젠가 이곳에 다시 찾아 오고 싶다'는 열망이 가슴 밑바닥에서 해무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러므로 삼천포 아가씨여,기다리는 순정만은 버리지 마라,헤이.

안병기 여행작

[감성 여행] 오늘, 실안 앞바다에서 기다림을 배우다
● 찾아가는 길


1번 경부고속국도 또는 35번 중부고속국도→ 비룡JC→ 산내JC→ 35번 통영대전고속국도→ 사천IC→ 사천. 대중교통은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사천까지 약 4시간 소요. 항공편(김포~사천)을 이용해도 된다.

● 여행팁

고운 최치원이 남녘 땅 제일의 경치라고 하여 남일대라 했다는 남일대 해수욕장은 코끼리 바위 등 경치가 수려할 뿐 아니라 백사장 모래가 무척 곱고 깨끗하다. 해수욕장은 오는 6일 개장 예정이다. 이곳에서 해수욕을 즐긴 다음 실안 해안관광도로의 아름다운 해안 일몰을 보며 삼천포대교에서 사천시 남양까지 드라이브를 즐기는 것도 권장할 만하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항공발달사에서부터 비행기·인공위성이 뜨는 원리를 이해하기 쉽도록 전시해놓은 사남면 항공우주박물관(055-851-6565)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야외에는 수송기·전투기 등 다양한 비행기 모형이 전시돼 있다. 항공우주박물관을 나서면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의 산실인 곤양면 다솔사(055-853-0284)에서 창작의 무대를 더듬어보며 고즈넉한 산사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색다른 맛이다.

● 맛집

삼천포 어시장(서부시장) 근처 파도한정식(055-833-4500)이 저렴하면서 맛깔스럽다. 생굴,오징어,개불,키조개,낙지 등 다양한 해산물이 한 상 가득 식객의 입맛을 돋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