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정밀화학에서 분사한 지 12년여 만에 연매출 1500억원의 중견 석유화학 플랜트 설비 전문제조기업으로 성장한 한텍. 박흥렬 사장(60 · 사진)은 28일 울산 남구 여천동 본사 겸 생산공장에서 "삼성 배지를 떼는 게 죽기보다 싫었는데 지금은 독립한 게 너무나 잘한 선택이었다"며 12년 전 일을 꺼냈다.

박 사장의 인생2막 스토리는 1998년 말 시작된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매서운 바람이 불어닥칠 때 박 사장은 삼성정밀화학 기기사업부 차장이었다. 이때 회사가 느닷없이 "핵심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분사를 통한 인력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통보해 왔다. 고민 끝에 그는 분사위원장 총대를 멨다. 그를 따라 앞날이 불투명한 분사에 합류한 선후배 동료의 수가 예상을 뒤엎고 기기사업부 전체인원의 절반이 넘는 25명에 달했다.

박 사장은 "당시 회사를 나온 동료 대다수가 주생산품과는 거리가 먼 압력용기를 만드는 별도 부서에 있으면서 적지 않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며 "결국 구조조정 1순위에 오르자 미련 없이 분사행을 결정했다"고 회상했다.

이들은 삼성정밀화학 공장 내 부지를 임대해 공장을 지었다. 퇴직금을 십시일반으로 모아 10억원으로 한텍을 창업했다. 부서별로 철저한 인센티브제를 도입해 경쟁체제를 유도하는 동시에 검증된 기술력과 고객만족 경영으로 국내 석유화학공장 설비공사를 따내며 착실히 기반을 다져갔다.

시간은 박 사장을 포함한 분사파의 편이 됐다. 분사한 후 외환위기가 끝나가면서 20년간 아웃사이드로 있으며 갈고 닦은 압력용기 제조기술이 한국 석유화학 플랜트 산업의 수출 효자 상품으로 급부상하는 행운을 맞게 된다. 분사한 지 1년여 만에 100억원 매출을 올린 것도 이 덕분이다. 탄력을 받은 박 사장은 내수시장 대신 해외로 과감히 눈을 돌렸다.

이는 반응기와 열교환기, 초저온기기 등 석유화학 공정에 들어가는 핵심 압력용기 설비에 대한 제조기술과 노하우만큼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출발한다. 창업 1년여 만에 압력용기와 보일러 수출을 위한 국제인증을 미국기계학회(ASME)와 중국 SQL(설비안전인증)로부터 잇따라 따냈다. 티타늄과 지르코늄 등 비철계통의 특수 화공기 제작기술과 영하 196도 이하 초저온에서 견디는 액화가스 저장설비 등 고도 기술에 대한 특허도 10여건 선점하며 공격적인 해외 수주에 나섰다.

이 결과 2001년 500만달러이던 수출은 2003년 1000만달러, 2005년 2000만달러, 2006년 5000만달러 등 폭발적인 성장세로 이어져 2009년에는 1억달러 수출탑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 된다. 이 회사가 거래하는 국내외 기업만 포스코 SK 삼성 미쓰비시 ABB BP 등 75개에 이른다. 직원도 136명으로 6배로 불어났다.

한텍의 이 같은 초고속 성장 덕분에 과거 퇴출 1호였던 직원들은 이제 국내외에서 알아주는 석유화학플랜트 설비 전문엔지니어로 변신해 중동 등지에서 스카우트의 손길이 뻗쳐올 정도로 인기 상한가다.

최근에는 중소형 원자로(일명 스마트)에 들어가는 스팀 발전기(증발기)실험장비 제작에도 성공해 원전 수출시장 진출 기회도 마련했다.

박 사장은 올초 "2020년까지 수출 7억달러,매출 1조원을 달성하겠다"는 장기비전을 제시했다. 그는 "'기술을 지배하는 사람이 세계를 지배하고 말 것'이라고 말한 한국비료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의 깊은 뜻을 분사한 뒤에야 뒤늦게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울산=하인식 기자 ha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