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가 승부를 걸었던 세종시 수정안이 폐기 수순에 들어갔다. 수정안에 반대하는 의원이 과반을 훨씬 넘는 만큼 수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남은 건 폐기방법 정도다. 국토해양위 부결로 정리하자는 야당 및 한나라당 친박계와 본회의에서 처리하자는 친이계가 맞서고 있어 진통은 겪겠지만 수정안의 운명은 이미 결판이 난 상태다.

정치권의 세종시 수정안 처리 과정은 우리 정치가 왜 '4류'소리를 듣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세 가지 이유에서다. 정치의 근본인 대화와 타협을 망각했고 갈등의 조정자 역을 포기했으며 국민적 논란을 잠재우기는커녕 불확실성을 더 키웠다. 무책임한 정치의 전형이다. '의원 숫자를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이른바 정치무용론은 그래서 나온다.

우선 정치 실종이다. 반대의견까지도 존중해 대화로 푸는 게 민주주의다. 야당이 지적하듯 정부안이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면 그 문제를 포함해 국회에서 논의하는 게 마땅했다. 여야는 거꾸로 갔다. 지난 10개월간 한 일이라곤 정쟁뿐이다. 지난 4월 수정안이 제출됐지만 야당과 친박계의 반대로 상임위에 상정조차 안 됐다. 단 한번의 진지한 토론도 없었다. 그리고는 심의절차도 생략한 채 표결로 수정안을 폐기시키겠다고 한다. 스스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부정한 것이자 직무유기다.

정치의 본령이 사회갈등을 조정,국민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측면에서도 우리 정치는 낙제점이다. 갈등을 조정해 풀어내기는커녕 갈등을 조장하고 키웠다. 입만 열면 민의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수정안에 대한 찬성 여론이 반대보다 10% 이상 높은 건 애써 외면했다. 오로지 표 논리를 앞세워 수정안을 정쟁화한 결과 국론은 4분5열됐다. 충청도 사람들도 둘로 갈라졌다. 국민의 마음은 한층 불편해졌다.

여야의'야합'으로 수정안은 폐기되겠지만 그 이후가 더 문제다. 수정안이 폐기되면 원안으로 가야 한다. 수정안에서 제시했던 싼값의 토지 제공 등 각종 혜택은 사라진다. 과학비즈니스벨트와 삼성,한화 등 대기업의 세종시 유치는 백지화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종시는 9부2처2청의 부처와 아파트 중심의 자생력 없는 '제2의 과천'이 될 공산이 크다.

세종시 원안 설계자조차 "인구 50만명이라는 그림만 그렸을 뿐 구체적인 안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다. 반대파 의원 사이엔 벌써부터 "원안에 자족기능을 보강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른바 '원안+α'다. 심지어 "세종시의 미래를 대선주자의 공약에 맡기자"는 주장까지 공공연하다. 수정안이 폐기되면 원안대로 간다는 게 정부의 확고한 입장인 만큼 유령도시가 되는 걸 막을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반대파조차도 원안대로 가선 명품도시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한 셈이다.

게다가 그들 말대로라면 세종시는 수정안 폐기 후 장기표류가 불가피하다. 수정안 폐기로 세종시 문제가 정리되기는커녕 불확실성만 더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정략의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의 몫이다. 그럼에도 "수정안을 우선 폐기시키고 보자"는 정치권의 접근법은 무책임하기 그지 없다. 당리당략적 정쟁에 국가 백년대계와 지역발전이라는 세종시 문제의 본질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세종시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없이 수정안 폐기방식을 놓고 싸우는 정치권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재창 정치부장 lee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