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확대·수입억제에 사활…美독립선언·아편전쟁 유발
서양의 16세기와 17세기는 근대적 세계의 출발점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에게는 매우 힘든 시절이었다. 엄청나게 치솟는 물가를 따라가지 못해 실질소득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면서 경제적 고통이 극심했다. 또한 종교개혁으로 인해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유럽 전체로 볼 때 1550년에서 1650년에 이르는 100년 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을 정도였다. 카오스의 한가운데서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온전하게 지켜줄 정부를 염원하게 됐다. 혼란과 무질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준다면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주더라도 상관없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짐이 곧 국가'라고 말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닐 수 있지만 절대주의의 시대적 당위성만큼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면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줄 막강한 군대가 있어야 하고,내부의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든든한 경찰이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나라가 부강해야 했다.
당시의 개념으로 볼 때 국부(國富)는 그 나라가 보유한 금은의 양으로 측정되는 것이었다. 금은의 보유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이는 것이 우선이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장벽을 높이고 값싼 상품의 확보를 위해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것도 정부의 일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초미의 관심 품목으로 떠오른 것들이 있었으니 커피,차(茶),설탕,초콜릿 등 새로운 기호품들이었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유에 궁전을 지어놓고 매일 저녁 화려한 연회를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하루는 오스만 튀르크의 대사가 본국에서 가지고 온 커피를 왕에게 권했는데 한모금을 입에 넣은 왕은 그 쓴맛에 질려 다시는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그는 좋아하던 핫초콜릿을 계속해서 즐겨 마셨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충치로 많은 고생을 했으며,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한 이를 뽑다가 턱이 빠지는 바람에 말년에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신민들은 곧 커피에 빠져들게 되었고 18세기에는 커피로 인해 많은 경제적 이득도 챙길 수 있었다. 1720년께 프랑스의 한 해군장교가 커피 묘목을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 지방에 옮겨 심는 데 성공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50년이 채 안 돼 카리브해 지역은 세계 커피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됐다.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의 자바 등지에서 커피를 생산하며 공급을 독점하다시피 하던 네덜란드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유럽에서 커피를 가장 먼저 대량으로 소비하기 시작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1650년 옥스퍼드에 첫 커피하우스가 생긴 이래 수십년이 채 되지 않아 영국 전역에 3000개의 커피하우스가 생겼다.
영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또 하나의 음료는 차였다. 차의 보급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은 1660년 왕정복구로 망명에서 돌아온 찰스 2세와 그의 왕비 캐서린이었다. 차 마시는 문화에 흠뻑 빠져있던 이들의 습관은 영국 상류사회의 전통적 음료였던 맥주와 와인을 차로 대체하게 만들었으며 차는 곧 일반 서민들도 매일 마시는 음료가 되었다.
17세기 중반 영국이 수입한 중국산 차의 물량은 18만파운드였는데 18세기 중반에는 4000만파운드로 늘어났다. 1676년부터 차에 과세하기 시작한 영국 정부는 18세기 중반 119%까지 세율을 올림으로써 막대한 재정수입을 거둘 수 있었다. 보스턴의 식민지인들이 이에 반발하여 독립을 선언하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중국과의 아편전쟁도 찻값을 지불할 방편이 마땅치 않았던 영국이 아편을 재배하여 팔기 시작한 데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하면 이 시기 차의 중요성이 그만큼 컸음을 알 수 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대왕이 커피를 금지시키고 부하들을 거리로 보내 커피 볶는 사람들을 처벌한 것은 유명한 얘기다. 이 또한 중상주의 정책에 근거하여 국부가 불요불급한 사치품에 낭비되는 것을 막으려는 처사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1732년 발표된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커피 칸타타'였다.
허구생 <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