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과장은 지난 12일 '대박'을 터뜨렸다. 월드컵축구대회 한국과 그리스전의 스코어(2 대 0)를 정확히 알아맞힌 덕분이다. 부원 20명이 2만원씩을 낸 내기에서 김 과장은 다른 동료 1명과 함께 승자가 됐다. 배당금은 20만원.한국팀도 이기고 내기에도 이겼으니 더할나위 없이 좋다.

월드컵 축구열기는 직장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스코어 알아맞히기는 기본이다. 밤새 다른 나라 경기를 시청하느라 잠이 모자라 하품하는 직장인들도 흔히 볼 수 있다. 업무 시간에 상사 눈치보며 인터넷 다시보기를 통해 전날 경기를 복원하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업무 시스템도 축구처럼 '45분 근무' '15분 휴식'으로 바꾸자고 주장하는 직장인도 많다.

따지고 보면 축구와 김 과장 이 대리들의 생활은 비슷하다. 이들은 회사 내 '미드필더'다. 부하들에겐 '압박'을 가하고 상사들에겐 '어시스트'를 해야 하는 처지.때로는 경쟁사를 '태클'로 저지하고 회사를 위해선 '할리우드 액션'을 써서라도 충성해야만 한다.

◆스코어 알아 맞히기는 기본

통신회사에 근무하는 이정일 대리(31)는 한국과 그리스전을 앞두고 세 군데서 내기를 했다. 직장동료,친구모임,동네조기 축구회에서였다. 각각 1만원씩 냈으니 3만원을 투자했다. 나름 축구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이 대리가 예상한 스코어는 2 대 1로 한국 승리.결과는 2 대 0으로 한국이 승리했다. 이 대리는 3만원을 날렸다.

그렇다고 이 대리가 손해만 봤던 건 아니다. 개막전인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멕시코 경기 결과 알아맞히기에서 승자가 됐다. 팀원 10명이 1만원씩 냈다. 당첨자는 2명.이 대리는 5만원을 챙겼다. 한국경기를 포함해 4만원을 내고 5만원을 벌었으니 남는 장사다.

◆17일은 월드컵표 회식데이

두 달 전 결혼한 공기업의 최모 과장(39)은 신혼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직장 동료들을 상대로 집들이 날짜를 예약했다. 남아공 월드컵 경기 일정을 보고 한국과 아르헨티나가 맞붙는 17일을 D데이로 정한 것.다행히 한국 대표팀이 월드컵 첫 경기인 그리스전을 승리해 집들이 흥행에도 성공할 것 같다. 최 과장은 집들이에 오는 사람에게 빨간색 티셔츠를 선물할 생각이다. 한국팀에서 골넣는 선수를 맞히는 사람에게는 별도의 시상을 할 예정이다. 최 과장은 "대부분 아파트 주민들이 축구 경기를 보는 날이기 때문에 직장 동료들끼리 마음 편히 떠들 수 있어 집들이 날짜로는 제격"이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동창회의 총무를 맡고 있는 은행원 김동훈 차장(41).김 차장은 월드컵을 앞두고 3D TV를 구입할까 고민하다가 300만원이 넘는 가격에 부담을 느끼고 포기했다. 대신 3D 중계를 해주는 극장에서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월드컵 경기를 보기로 결정했다. 주요 극장에서 월드컵 경기 상황을 3D로 중계한다는 얘기를 듣고 일찌감치 예약을 해뒀다. 실내에서 시원하고 편하게,3D로 실감나는 영상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까지 설레인다.

◆이미 월드컵 타임 체제로 전환

유통업체에 다니는 장도민 과장(38)은 23일 새벽 3시30분 열리는 한국과 나이지리아전을 회사 팀동료들과 찜질방에서 보기로 약속했다. 어수선한 거리응원 대신 회사 인근 찜질방이 더 낫다고 판단해서다. 경기를 보고 간단히 눈을 붙이고 씻을 수 있는 곳으로도 제격이었다. 이미 지난달 1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개별 찜질실을 예약해 뒀다.

정보기술(IT) 벤처업체를 운영하는 한 모 사장은 23일 회사 출근 시간을 오전 9시에서 오후 1시로 늦췄다. 한 사장은 "어차피 대부분 직원들이 새벽 축구 경기를 보고 나올 텐데 몽롱한 정신으로 일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쉬었다가 오는 게 업무 효율을 위해서도 더 낫다"고 판단했다.

축구 마니아인 보험사의 김상헌 과장(36)은 일찌감치 월드컵 기간 중 휴가를 신청했다. 지친 몸으로 출근해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느니 최상의 컨디션으로 깔끔하게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서다. 김 과장의 가장 큰 고민은 "휴가기간을 언제로 잡느냐"였다. 구체적으로 한국의 예선전 위주로 보느냐와 빅매치인 16강 경기부터 제대로 보느냐가 핵심이었다. 김 과장은 결국 우리나라의 마지막 예선전이 열리는 23일부터 16강 경기가 열리는 30일까지를 휴가기간으로 정했다.

◆'청일점'의 비애

특급호텔에 근무하는 김모 과장(38)은 회사에 들어온 뒤 축구나 야구 같은 세계적인 빅매치 때 거리 응원전에 가본 적이 없다. 호텔업종의 특성상 직원 대부분이 여자인 탓에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평일 야근과 주말 특근을 전담하고 있어서다. 2002년 월드컵 때도 거리 응원은 꿈도 꾸지 못했다. 유일한 남자이자 막내여서 한국팀 경기가 있는 날이면 근무를 도맡아야 했다. 2006년 월드컵 때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 과장은 이번 월드컵에 남다른 기대를 걸고 있다. 팀내 후배 남자 직원이 한 명 들어온 데다 올해 초 과장으로 진급해 팀내 서열 2위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월드컵 베이비'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윤모 차장(42)은 '이번 월드컵엔 기필코 일을 내리라'고 작심했다. 캠퍼스 커플인 윤 차장은 원래 '부부끼리 평생 둘이서만 즐기며 살자'는 '딩크족'(DINK · Double Income No Kids)이었다. 20대에 결혼했지만 5년 넘게 아이를 갖지 않았다. 그런데 그만 2002년 한 · 일 월드컵 때 인생관에 변화가 생겼다. 당시 우리나라 대표팀이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극적으로 승리하는 날,윤 차장 부부는 흥에 겨워 그동안의 '묵약'을 깨고만 것.뜻하지 않게 아이가 생겼지만 딸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된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됐다. 이후 윤 차장은 월드컵 때마다 아이를 갖겠다는 다짐을 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도 둘째 아이가 생기기를 바랐지만 한국팀이 16강에 못 오른 탓인지 2연속 '월드컵 베이비'의 꿈은 실패하고 말았다.

윤 차장은 "동생을 낳아달라"고 보채는 큰 딸을 위해 이번 월드컵 기간에 아내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볼까 계획 중이다.

정인설/이정호/김동윤/이고운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