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을 마치고 고국행 비행기를 타려는데 공교롭게도 로마 공항에서 파업이 발생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모두 엉망이 되고 여행객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항공 정보에 민감하게 움직였다. 여행객들은 발을 동동거리는 반면 항공사 직원들은 느긋했다. 그들의 느릿느릿한 일처리를 지켜보고 있자니 짜증이 나는 걸 참기 어려웠다. 가까스로 귀국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파업이 비교적 빈번한 유럽 사람들은 이 상황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것 같던데,내가 한국 사람이라서 유독 참지 못하고 급하게 행동한 건 아닌가' 돌아보게 됐다.

한국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성미가 급하고 기민하다고들 한다. 그래서인지 한국 기업의 경영 변화나 고객 서비스 또한 매우 신속한 편이다. 한국 경제의 급성장은 핵심 경쟁 요소로 부각된 '속도'를 경영 활동에 적극적으로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내가 몸담고 있는 기업을 비롯해 많은 해외 기업들이 방한하는 이유도 이 같은 한국 기업들의 속도 경영을 배우기 위한 목적이 포함된다. 속도는 급변하는 현 시대에 분명한 경쟁우위 요소다.

반면에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슬로 라이프가 사회 일면에서는 추앙받고 있다. 조리 및 먹는 과정에서 정성과 시간을 들이는 슬로 푸드,느리게 걷는 슬로 워킹,환경을 생각하는 슬로 패션 등 슬로 라이프 스타일이 그것이다. 최근 경영자 리더십 개발과 코칭 세션에 자주 등장하는 말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시간에 쫓기는 경영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천천히 깊게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라며 의식적으로 이러한 시간을 만들라고 조언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 빌 게이츠가 휴가 중 실천해 유명해진 '생각주간(Think Week)'을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속한 상황 판단과 빠른 의사 결정 등 하루 24시간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생산성을 극대화해야 하는 현대인들의 삶과 느림의 미학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이 양립하는 데는 시대 변화에 뒤처지지 않으면서도 자아를 보호하고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우리 회사 직원 한 명은 이런 균형을 잡기 위해 '주중에는 바쁘게 살되,주말에는 최대한 천천히 살고자 노력한다'고 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커리어와 개인의 안녕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는 것이 이제는 개인의 최고 능력으로 평가받는 시대가 되었다. 기업들도 '패밀리 데이'를 정해 그날 하루만큼은 직원들의 야근을 사칙으로 금한다든가 사내에 다양한 복지시설을 만든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조직 구성원들 삶의 균형과 조화를 지원하는 데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균형을 잘 잡는 것도 기술이다. 느리게 걸으면서 빨리 사고하는 연습을 해보자.

황수 GE코리아 대표 soo.hwang@g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