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박수를 치셔도 됩니다. " 9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 연설이 끝나도 박수가 나오지 않자 박희태 국회의장이 이렇게 분위기를 유도했다. 동료 의원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를 쳤다. 박 의장이 취임한 지 이틀째 국회의원들이 보인 작은 변화다.

박 의장은 본회의 직후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시종 유머를 잃지 않았다. 1988년 정치계에 입문한 뒤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주저않고 '술'이라고 답했다. 폭탄주의 원조다운 말이다. 그렇다고 일에서도 유한 건 아니다. "우리 국회가 불신을 받는 건 법을 스스로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며 '법대로'운영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박 의장은 또 국회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의원들이 다시는 의사당 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국민들의 엄중한 심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임위원회를 통과한 법안까지 되돌려보내는 법제사법위원회의 제왕적 행태에 대해서는 '월권'이라 규정짓고 해당 의원들의 자성을 촉구했다.



▼18대 전반기 국회 성적은 몇 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평균'이죠.하지만 후반기에는 '평균'에서 '우수'로 가야 합니다. 국민들은 국회의원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가장 싫어합니다. 국회의원들이 좋은 점수를 받고 싶으면 법대로 토론과 결정이 이뤄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저 또한 의장으로서 법대로 의사를 진행해야겠지요. "

▼역대 의장들이 국회의원들에게 법대로 의정활동을 강조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원내대표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쟁점 사안이 있으면 몇날며칠을 협상해야 합니다. 그래도 타협점을 못 찾으면 둘이서 손 붙잡고 산중 암자에서 결론이 날 때까지 나오지 말아야죠.다행인 것은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 모두 정치 경력이 풍부하고 권력의 핵심부에도 일해 봤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이전의 어느 원내대표보다 활발히 소통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

▼몸싸움과 막말로 정치가 4류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젠 국민이 바뀌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국회의원들이 폭력을 쓰는 등 파행적으로 국회 의정활동에 임한다면 국민들이 선거에서 그 사람을 뽑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확실하게 심판하면 국회폭력은 조만간 없어질 것입니다. 이전에 영국 의회를 갔더니 여야 의원들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가운데 그어 놓은 선을 절대 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죠.예전에 칼을 차고 의회에 들어오는 사례가 많아서 그은 선이었지만 지금은 서로가 지켜야 할 예의의 상징이라고 하더군요. 그 선을 넘어 국회로 돌아온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우리도 국민의 심판을 통해 그런 관행을 만들어야 합니다. "

▼법사위의 월권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맞습니다. 법사위도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원래 법사위는 법안의 체계 · 자구심사만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내용에 대한 정책적 판단까지 하는 게이트키핑 역할을 하고 있어 여러가지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

▼18대 국회에서 의원 발의 법안이 폭증하고 있는데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숫자의 함정에 빠지면 안 됩니다. 연말이 되면 법안 발의 수와 처리율로 국회의원들이 일은 안하고 게으르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전에 국회의원들이 법안 발의를 하려면 당 정책위원회의 심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때문에 발의하기는 힘들었지만 발의한 뒤에는 당 차원에서 지원을 받았습니다. 통과할 수있는 동력이 강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동료 의원들 10명의 서명만 받으면 발의할 수 있습니다. 법안이 엄청나게 쏟아질 수밖에 없죠.지금 펜딩(계류)된 법안만 4000개가 넘습니다. 이런 법안들은 국회 제출만 됐을 뿐 추진에너지가 전혀 없습니다. "

▼상임위원회 차원에서 거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동료 의원들이 인지상정상 반대하기 힘든 분위기가 있습니다. 이미 서로 알고 있긴 합니다. 필요한 법안인지 말도 안 되는 법안인지 말입니다. 하지만 이 법안을 '킬'시키자는 말은 못하고 계류만 시켜놓고 있는 거죠.말도 안 되는 풍토입니다. 의원들이 국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지 상호간에 눈치를 보면 되겠습니까. 냉엄하게 생각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

▼후반기 국회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선거구제 개편과 개헌 등 거대 담론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워낙 예민한 사안들입니다. 저는 이제 한나라당 소속이 아니라 무소속입니다. 그런 사안을 언급하는 것은 적합하지 못합니다. 어떤 논의가 일어나든 소통의 장을 마련하는데 집중할 뿐입니다. "

▼의원외교가 너무 형식적이라는 비판이 나옵니다.

"의원외교를 강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외유성 해외 출장이 아니라 정치선진국의 국회운영 과정을 제대로 공부하자는 것이지요. 국회 안에 의원외교활동을 전담하는 부서를 설치하는 방안도 고민 중입니다. 지금의 국회는 외형을 치장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국회를 한번 둘러보십시오.늘 공사하고 있습니다. 뭘 짓고 고치고….그렇게 쓸 돈이 있으면 의원들 의정활동에 지원해야죠.과거에는 의원회관 없이도 일 잘했습니다. 지금 국회는 콘텐츠는 없으면서 외관만 꾸민 결과 마치 회색 도시의 뒷골목과 같은 모습입니다. 예전엔 꿩이 새끼들 줄 세워서 걸음마시키는 모습도 곧잘 볼 수 있었는데 말이죠."

▼예산 편성권 문제도 쟁점입니다.

"예산에 대해 국회가 실질적인 권능 행사를 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산편성권을 국회로 이전해야 합니다. 국회가 예산편성 초기부터 기획재정부에 자료를 요구하는 등 관여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야 합니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연초부터 예산편성 방향과 내용에 대해 계속 따지고 관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

▼정치인생 22년째입니다.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술이죠.고래 경(鯨)에 술 음(飮),이 두 글자로 설명하면 되겠습니까. 참 많이 마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마신 술의 양만 5대양은 될 거라고도 하더군요. 22년간 국회 사람들도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별로 없죠.요즘은 와인이 유행하는 것 같던데 저는 아직도 소주가 좋습니다. 소주랑 맥주랑 섞은 폭탄주도 좋죠(폭탄주는 박 의장이 처음 유행시킨 것으로 유명하다).김진표 전 의원이 저한테 폭탄주를 배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

▼좌우명은요.

"정치를 하면서 늘 생각하는 사자성어가 두 개 있습니다. 유능제강(柔能制剛)과 상선약수(上善若水)입니다. 유능제강은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뜻이죠.제가 성격이 부드러운 편이라 친구들이 법질서를 세울 수 있겠느냐고 놀리듯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강한 카리스마만이 해결책은 아닙니다. 오히려 소통을 가로막을 수 있죠.상선약수는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정치인은 끊임없이 국민을 향해 자세를 낮춰야 합니다. 사리사욕을 취하려는 지저분한 마음을 물처럼 정화시켜야 한다는 의미도 있지요. "

▼어떤 국회의장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가장 사랑받은 의장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으면 좋겠습니다. "

정리=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