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순이가 자신의 쌀을 갑돌이의 사과와 교환한다면 교환되는 쌀과 사과의 시장가치는 같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 교환하는 까닭은 갑순이는 사과를 더 좋아하고 갑돌이는 쌀을 더 원하기 때문이다. 시장가치로는 쌀과 사과가 서로 같더라도 개인이 평가하는 가치는 서로 다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돈 1만원의 가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1만원이다. 그런데 1만원어치 쌀과 1만원어치 설탕은 금액으로는 서로 같지만 소비자들의 가치평가는 천차만별이다. 돈 1만원으로 어떤 사람은 쌀을 사고,어떤 사람은 설탕을 사는 데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쌀 1만원어치와 설탕 1만원어치의 가치는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시장가치가 1만원으로 서로 같다고 해서 내가 가진 1만원어치의 쌀을 다른 사람이 가진 1만원어치의 설탕과 항상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돈 1만원은 1만원짜리 상품과 항상 교환되지만 1만원짜리 상품끼리는 잘 교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내가 쓰기 시작한 칫솔은 1000원짜리로,나에게 내 칫솔의 가치는 1000원이지만 다른 어느 누구도 내게 1000원을 지불하고 칫솔을 사가려 하지 않는다.

이처럼 교환 과정에서 화폐는 자신의 가치를 항상 100% 실현하지만 일반 상품은 그렇지 못하다. 상품의 유동성(liquidity)이란 교환 과정에서 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정도를 뜻한다. 화폐의 유동성은 완전하지만 쌀이나 설탕 같은 상품의 유동성은 화폐보다 크게 떨어진다. 예컨대 내 칫솔의 유동성은 0으로 가장 낮다.

모든 사람들이 그 가치대로 인정하는,따라서 유동성이 큰 상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귀금속이다. 귀금속은 장신구 등으로 생활에 사용되기도 하지만 재산의 저장수단으로도 널리 활용된다. 처분해야 할 때 제값을 받고 처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시장교환도 확대되었고 유동성 높은 금과 은이 자연스럽게 화폐로 유통되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가치가 불안정하던 은이 점차 화폐의 기능을 상실하였고,꾸준하게 안정된 가치를 유지해온 금만이 화폐로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은행이 보관 중인 금과의 교환을 보증한 태환지폐도 금과 함께 화폐로 유통되었다. 소위 금본위제의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경제 규모와 더불어 시장교환의 규모도 급속히 커졌지만,대규모화한 시장교환을 매개할 만큼 충분한 금을 생산해낼 금광은 발견되지 않았다. 금본위제는 결국 종말을 맞았고,세계 각국은 금태환이 불가능한 불환지폐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각국은 지폐를 발행할 수 있는 중앙은행을 지정하고 지폐의 발행량을 조절하는 관리통화제를 채택하였다. 금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금화를 화폐로 사용하던 사람들은 국가와 중앙은행의 신용을 믿고 지폐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