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소설가 김승옥씨가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불문과 출신인 자신이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4 · 19혁명 덕분이라는 것이다. 4 · 19세대가 늘 되뇌는 시민혁명에 대한 찬가에 어느 정도 식상해 있던 터라 심드렁하게 듣고 있으려니 이어지는 이야기가 그게 아니었다.

그는 4 · 19가 내세운 무슨 고상한 이념이나 정치적 성과를 말하고자 한 게 아니었다. 단지 4 · 19혁명의 여파로 당시 대학에서 정상적인 수업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그 덕분에 출석이나 학점 압박을 별로 받지 않고 하숙집에서 열심히 습작을 한 결과 일찍 등단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유머가 곁들여진 이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작가의 탄생에 개인적 재능과 열정 외에 시대적 상황이나 분위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김승옥을 비롯해 1960년대 한국문학을 새롭게 재편하는 데 공헌한 인물들의 상당수는 외국문학 전공자들이었다. 국문학 전공자 이상으로 영문학 불문학 독문학 전공자들이 해당 전공 영역을 넘어 한국문학의 창작과 비평에 뛰어들었고 철학이나 미학,심지어 정치학이나 사회학 같은 인문학 바깥 영역의 전공자들까지 한국문학의 영토에서 인상적인 족적을 남겼다.

또 80년대 민중문학의 득세나 90년대 여성작가의 약진 역시 그 시대 상황과 깊이 관련된 사안임이 분명하다. 민중문학이 위세를 과시할 때엔 지식인 작가보다 농민이나 노동자 출신 작가라는 게 더 화려한 조명을 받는 이유가 되기도 했고 그래서 그 당시 어떤 작가는 약력에서 자신의 대학 이력은 생략한 채 순수 노동자 출신인 양 위장(?)하기도 했다. 여성 작가들의 활발한 등단과 문학적 성취의 배후에 페미니즘 확산과 여성의 사회진출 보편화라는 시대적 추세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어떤 경향이 두드러지면 그것에 대한 반발도 일어나게 마련이다. 한때 우리 문학이 지나치게 여성 중심적으로 흘러간다는 점을 걱정한 한 작가는 신춘문예 심사에서 일부러 남자를 뽑기 위해 고심 끝에 군대 이야기를 쓴 응모작을 뽑았는데 그 작품의 작가 역시 여자여서 허탈해했다는 풍문이 전해져 오기도 한다. 그래서 백화점이나 신문사의 문학 관련 강좌가 여성작가를 대량생산하는 양성소로 지탄(?)받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와 유사하게 요즘은 시나 소설 창작은 문예창작과 출신이,비평은 국문과 출신이 대종을 이루는 현상에 대한 비판이나 개탄이 일각에서 제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춘문예든 문예지 공모든 뽑아 놓으면 거의 다 문예창작과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들 문예창작과 출신의 시인 소설가를 비평하는 세력은 대개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이들이다. 우리 문학 생태계가 지나치게 단색화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는 그럴 듯한 면이 있다. 심지어 동종교배는 좋지 않다는 생물학적 은유까지 첨부되기도 한다.

80년대 민중문학이 기승을 부릴 때 한국문학이 금방 망조가 들지 않을까 걱정한 일부 보수적 문인의 판단이 지금 보면 틀린 것처럼,여성작가가 지나치게 많아져서 한국문학 자체가 여성화 유약화되지 않을까 염려한 일부 남성 문인의 판단이 지금 보면 편벽된 것처럼,특정 학과 출신의 점유율이 높아지는 것을 한국문학의 쇠퇴와 연결시키는 일부 논자의 단정적 언급도 언젠가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피상적인 주장으로 판명될 것이다. 상당 기간 문학과 더불어 살아오며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은 문학은 결국 문학의 길을 간다는 사실이다. 섣부른 억측이나 예단보다 문학의 본질에서 더 멀리 떨어진 것은 없다.

남진우 <시인· 명지대 교수>